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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지난 국토여행기 2 - 서울 성북동과 성북동 사람들3

by 장돌뱅이. 2012. 7. 2.

<찻집 수연산방(壽硯山房) - 소설가 이태준의 옛집>
심우장을 내려와 지하철역 방향으로 5분쯤 걷다 보면 오른편으로 붉은 벽돌로 깔끔하게 지어진 덕수교회를 보게 된다. 수연산방은 그 맞은편 성북2동사무소 옆에 자리 잡고 있다. 1998년에 전통찻집으로 문을 열었다.

이곳은 소설가 상허(尙虛) 이태준(1904 -?)의 집으로, 비가 들이치는 것을 막기 위해 함석처마를 덧댔을 뿐 나머지는 이태준이 머물던 시절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한다. 그 때문에 이태준과 관련된 자료 몇 점이 거실에 전시되어 있기도 하다. 대문을 들어서면 작은 마당에 가꾸어진 화단이 소담스럽고, 우물과 두레박, 장독대가 정겹게 다가온다. 마당 가장 안쪽에 ㄱ자 모양의 소박한 기와집 한 채가 있다. 문향루(聞香樓)라는 현판이 걸린 건물은 이태준이 1933년부터 1946년까지 머물면서 「달밤」,「가마귀」등을 썼던 곳이다.

함석처마의 색과 형상이 다소 눈에 거슬리지만 전체적으로 본래의 수수한 분위기를 어쩌지 못한다. 향기를 맡는 것이 아니라 듣는다는 표현의 ‘문향(聞香)’이 매우 감각적이다. 격자무늬 창살에 유리를 끼운 그곳이 가장 인기가 있는 차 마시는 자리라고 하나 아내와 나는 창호지 바른 문이 있는 건넌방을 좋아한다. 햇살이 밝은 날 창호지에 걸러져 부드러워진 빛도 좋고 미닫이로 된 문을 열고 마당을 내다보며 마시는 차 한 잔이 무척 그윽한 기분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이태준이 지은 『문장강화(文章講話)』를 읽어보았다. 『문장강화』는 한마디로 글쓰기 지도서이다. 요즈음 대학입시에서 ‘논술’이 강조되면서 글쓰기에 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문장강화』는 그 원조이자 격을 달리하는 노작(勞作)이다. 이태준은 이미 일제강점기 당대에 정지용과 쌍벽을 이루는 문장가이고 ‘한국 단편소설의 완성자’ 로도 불렸지만 『문장강화』에는 다른 사람의 격조 높은 예문을 풍부하게 인용하여 좋은 글이 무엇인지 알기 쉽게 설명하여 준다.

 그는 일제 강점기 동안 김기림, 이효석, 유치진 등과 함께 구인회(九人會)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어떤 이념적 편향이 없이 순수문학에 주력하였다. 일제의 강요로 해방 직전 “대동아전기”를 번역하고 ‘문인보국회’에도 참여하는 등의 친일행위를 한 그는 해방 이후에는 좌익 문인단체의 결성을 주도하는 등 사회주의자로 급변신을 하게 된다. 해방 공간에서 이태준의 생각은 그의 소설 「해방 전후」에 작가의 분신인 주인공 ‘현’을 통해 잘 나타나 있다.

지금 내가 변했느니, 안 했느니 하리만치 해방 전에 내가 제법 무슨 뚜렷한 태도를 가졌던 것도 아니구요. 원인은 해방 전엔 내 친구가 대부분이 소극적인 처세가들인 때문입니다. 나는 해방 후에도 의연히 처세만 하고 일하지 않는 데 반댑니다. (중략) 지금 이 시대에선 이하(李下)에서라고 비뚤어진 갓(冠)을 바로잡지 못하는 것은 현명하기보단 어리석음입니다. 처세주의는 저 하나만 생각하는 태돕니다. 혐의는커녕 위험이라도 무릅쓰고 일해야 될, 민족의 가장 긴박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1946년 무렵 「해방 전후」를 통해 본 이태준은 열정과 낙관에 차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큰누이에게 성북동 집을 맡기고 홀연히 월북을 하게 된다. 그 후 한국전쟁 때 종군기자로 참전도 했던 그는 1955년 소련파 숙청시 함경도 탄광촌으로 추방되었다. 그의 죄목은 일제시대의 구인회 활동의 반동성과 전쟁기 소설의 친미적 성향이었다고 한다.

그의 마지막 소식은 한 남파공작원의 수기를 통해서 전해진다. 수기에 따르면 1969년 이태준은 북한에서도 후미진 곳에 속한다는 마천령산맥 기슭의 장동탄광지구에 부인과 함께 살고 있었다.

노인은 키가 훤칠하고 나이에 비해 건강한 체구였다. 젊었을 때는 꽤 미남일 성싶은 얼굴이었다. 척 보기에 범상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남한말을 써서 궁금증이 더했다.
나는 정중하게 물어보았다.

“실례지만 뭐하는 분이시죠?”
“......”
그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어디선 본 얼굴 같기도 했다. 땜질을 하면서 나는 그의 얼굴을 곰곰이 뜯어보았다. 한참 동안 생각해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나는 물어나 보자 하고 다시 말을 걸었다.
“혹시, 글 쓰시는 분 아니십니까?”
“......”
내 말에 무슨 충격이나 받았는지 멍한 표정을 짓다가 웃음을 흘리는 그는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태준이라 합니다.”(중략)
“헌데 아직도 글 쓰십니까?”
나는 이 사실이 궁금했다.
“쓰고는 싶소만......”
그의 표정이 무척 쓸쓸해 보였다.

- 김진계,  『어느 북조선 인민의 수기, 조국』중에서 -

그 후의 소식은 알 길이 없다. 이미 어느 곳에서 파란 많은 삶을 마감했으리라 추측해 볼 뿐이다. 한 소설가의 말년에 글을 쓸 공간과 자유조차 마련해주지 못할 정도로 각박한 우리의 현대사가 이럴 때 옹졸하고 잔인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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