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과 사진/한국

지난 국토여행기 2 - 서울 성북동과 성북동 사람들1

by 장돌뱅이. 2012. 6. 27.

성북동(城北洞)은 서울 도성의 북쪽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한때는 일제 강점기나 해방 이후에 지어진 ‘개화된’ 조선집들이 밀집되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개발에 떠밀리며 위축되고 사라져 큰길 뒤쪽 후미진 골목길에 들어서야만 그 흔적과 마주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서울의 어느 다른 곳과 차별성이 없는 그런 외양을 지닌 골목길 속엔 이 땅의 위대한 선각자들이 남긴 이야기가 풍성하다. 성북동을 여행해야 할 이유이다.

지하철 4호선의 한성대역 6번 출구를 나와 아내와 함께 그 사연의 현장을 돌아보았다. 비록 그들과 일체가 된 삶을 영위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들의 체취가 배인 장소를 서성이며 그들의 삶을 반추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다.


<최순우의 옛집>
최순우 (崔淳雨 1916-1984)는 본명이 희순(熙淳)이고, 호는 혜곡으로 1974년에서 1984년까지 제4대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재직하였다. 황해도 개성 출신으로 1943년 개성부립 박물관에 입사한 이래 일생을 박물관을 지키고 키우는 한편 한국의 미를 탐구하는데 보냈다. 특히 우리나라의 도자기와 전통공예 그리고 회화 등의 분야에서 큰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고 한다. 그를 두고 “오직 박물관을 위해 헌신한 박물관의 산 증인이자 역사” 라거나 “한국미의 탐색자이자 대변인”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최순우가 살던 옛집은 전철역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는 1976년 이사하여 작고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한 때 다세대주택의 건립이 추진되면서 헐려 나갈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금으로 자연자원과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내셔널트러스트운동 덕분으로 남게 되었다.

최순우의 옛집은 복원과 보수공사를 거쳐 2004년 4월 10일 개소식을 가진 뒤 현재 시민들에게 무료로 공개되고 있다. 1930년대에 지어진 이 집은 당시 성북동 근처에 많이 지어지던 건축 양식을 따르고 있다. 즉 ‘ㄱ’ 자형 안채와 ‘ㄴ’ 자형 바깥채로 건물이 마당을 사이에 두고 들어서 모서리가 터진 ‘ㅁ’ 자 형을 이루고 있다. 대문을 끼고 있는 바깥채는 현재 관리사무실로 쓰고 있는 듯했고 안채에는 최순우의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만나는 안마당에는 나무 쳐 그루가 심어진 화단이 있고 안채 뒤쪽으로 가면 뒷마당이 있다.  뒷마당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공간으로 장독대와 몇몇 석물들이 늘어서 있어 안마당보다는 아늑해 보인다.관리가 잘 되어 전체적으로 최순우의 집은 깔끔한 느낌이다. 원래부터 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저런 모양의 담장과 벽도 아기자기해 보인다. 진수성찬의 한정식보다는 정갈한 찬 몇 가지만 차려 나오는 소박한 백반상차림 같은 집이다.

최순우의 저서로는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가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 책은 본격적인 연구서가 아니라 한국미에 관해 평이하게 서술한 수필 같은 책이다. 그러나 거기서 느껴지는 우리 것에 대한 그의 사랑과 자부심, 열정과 깊이는 대단해 보였다.

그가 거창한 궁궐의 건축미나 고려청자의 빛과 문양의 고상함, 혹은 유명 화가가 그린 그림의 위대한 가치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보는 새로운 눈을 얻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아내와 나는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자주 만나면서도 무심히 지나치는 작은 것들에 대한 그의 꼼꼼하고 정감 어린 설명을 더 좋아한다.

“하늘을 향해 두 귀를 사뿐히 들었지만 뽐냄이 없는 의젓한 추녀의 곡선, 아낙네의 저고리 도련과 붕어밸 지은 긴소매의 맵시 있는 선, 외씨버선 볼의 동탁한 매무새, 초가지붕과 기와지붕들이 서로 이마를 마주 비비고 모여선” 풍경에 대한 글이 그렇고, 아래에 길게 인용하는 장독대에 대한 글이 그렇다. 이토록 세세하고 자잘한 것에까지 따뜻한 애정을 보낼 수 있는 그의 안목이 티 없이 맑아 보인다.

뒤뜰 안 정갈하고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은 장독대. 그리고 그 위에 줄지어 앉은 독개그릇들의 차림새나 그 언저리에서 풍기는 장내음만 가지고도 그 주부의 살림 솜씨나 그 집안 가도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고들 한다. 말하자면 장독대는 마치 뒤뜰 안에 자리 잡은 그 집안 가도를 보이는 보임새 같은 것이기도 해서 예전부터 한국의 주부들은 이 장독치레를 자랑삼아 왔다. 따라서 무의식 중에 잘생긴 한국의 독개그릇들의 아름다움에 반했고 이에 대한 심미안이 스스로 길러졌던 것이다.

괴로움이나 절절한 소원이 있을 때면 정한 수 한 그릇 장독대에 바쳐놓고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우러르던 곳도 바로 이 장독대들이다. 뜰이 넓은 집이면 이 장독대 둘레에는 으레 봉선화나 양귀비꽃 같은 키 작은 풀꽃들을 가꾸고, 아침마다 한 번씩은 물걸레질을 해야만 마음이 개운해질 만큼 장독들은 아낙네들의 사랑을 받는다.

그리고 장독들은 해묵은 놈일수록 은근하고 점잖아 보이고, 행주질을 많이 받은 놈일수록 길이 들어서 독은 야릇한 윤기를 더하고 소리없는 즐거움을 주인에게 히죽이 표시한다. 그러나 장독들은 때로는 시무룩하고 때로는 허전해하며 또 슬퍼할 줄도 안다. 말하자면 장독은 주인의 심정을 반영하는 거울의 구실도 하는 것이다. 슬플 때 바라보는 장독들은 일그러진 주인의 얼굴을 가슴 위에 비춘 채 초근히 젖어 보이고 기쁠 때 바라보는 장독들은 마음이 부풀어서 아낙네들의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짓는 것이다.

장독대에는 비록 함박꽃처럼 화려하고 푸짐한 즐거움은 없다. 그러나 햇살을 받은 장지문의 은은한 한지의 멋, 그리고 삼베 생모시 같은 소박하고도 정다운 아름다움이 오지 독개그릇이 지닌 착하디 착한 아름다움과 어울려 함께 살고 있다. 한국의 독개그릇은 그리 서러울 것도 그리 즐거울 것도 없이 한국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고 같이 살아간다.

전국 방방곡곡의 무수한 가마에서 수없이 구워내던 이 오지독들은 각기 제고장의 냄새를 훈훈히 풍기면서 무던히도 동포의 얼굴을 닮아왔다. 이 못생긴 것 같으면서도 지지리도 착하고 은근하고도 또 정다운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마치 동포들의 정다운 얼굴들이 포개져서 보이는 것만 같아진다.

- 최순우의 글 중에서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