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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지난 국토여행기 1 - 남도의 땅끝으로 봄마중을 가다 4

by 장돌뱅이. 2012. 6. 26.

<만세토록 허물어지지 않을 땅, 대흥사(大興寺)>

*위 사진 : 대흥사 천불전의 꽃창살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을 한 청허당 서산대사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가사(袈裟)와
발우(鉢盂)를 해남의 두륜산에 두라고 유언을 했다. 제자들이 왜 그렇게 멀고 외진 곳을
택하는지 궁금해 하자, 서산대사는 그곳이 “만세토록 허물어지지 않을 땅”이라고 했다.
이로서 서산대사의 법맥은 대흥사에서 이어지게 되었다. 그 후로 대흥사는 크게 번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위 사진 : 대흥사로 오르는 구곡장춘동의 길

대흥사는 두륜산 계곡의 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도 계곡을 따라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한다. 서산대사의 예언처럼 그 어떤 소란도 쉽게 들어올 수 없는
곳으로 보였다. 명당의 평화로움이 돌본 탓인지 길 양옆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가득
들어서 있다. 아직 나뭇잎이 돋아나지 않은 이른 봄임에도 동백나무 같은 ‘늘푸른 넓은잎’
나무들이 윤기 나는 잎으로 받아내는 초록 햇살은 숲길의 분위기를 싱싱하게 만들었다.
숲 속으로 난 길을 천천히 걷는 일은 아내와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생각하는
일 중의 하나다. 숲에 대한 감동과 존경을 품고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 숲은 맑은
공기로 우리의 심성도 정화시킨다고 믿는다. 입구에서 경내까지 이어진 이곳 십리 숲길을
사람들은 장춘동(長春洞)이라 부른다고 했다. ‘봄이 오래 머무는 골짜기’ 라는 뜻이다.
아내와 나의 기억 속에도 그 이른 봄의 숲길은 오래 남을 것이다.  


*위 사진 : 충남 수덕사 앞의 수덕여관과 더불어 아내와 내가 가장 머물고 싶은 여관, 유선관

절로 가는 도중에 있는 유선장여관(유선관)은 운치 있는 숙소이다. 이런 여관에서
쉬어갈 정도의 시간적 여유도 갖지 못하면서 여행기를 쓴다는 것은 낮 뜨거운 일이라는
자책을 해본다. 언젠가 좀더 넉넉한 시간을 만들어 이곳에 잠자리를 잡고 두륜산에
올라보고 싶다.

해탈문을 지나 경내에 들어서면 대흥사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두륜산에서 흘러내린 금당천을 경계로 대웅보전이 있는 북원과 천불전이 있는 남원으로
나뉘고 각각의 구역은 낮은 돌담에 둘러싸인 채 당우가 조밀하다. 아내와 난 숲길을 걷듯
조용히 바람소리만 가득한 경내를 걸었다. 

     각 당우를 낮은 돌담으로 둘러치고 그 사이사이 공간에는 해묵은 묘목과 맑은 계곡
     그리고 무염지가 자리잡게 하여 산사의 아늑함을 유지하면서도 대찰이 지니는 위용을
     잃지 않았으니 그 공간의 경영이 자연을 거스름이 없으며 공간을 낭비한 것도 없다.
     대흥사의 호방함과 안온함은 이렇게 이룩된 것이었다.
                                     -유홍준, 『나의문화유산답사기』1권 중에서- 


*위 사진 : 대흥사에 남아 있는 추사 김정희와 원교 이광사의 필체

대흥사는 대웅보전의 현판에 얽힌 이야기로 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1840년 제주도로 귀양가던 추사 김정희는 이 현판을 보고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 놓은
것이 원교 이광사인데 어떻게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버젓이 걸어 놓을 수 있는가”라고
호통을 치며 현판을 떼어내고 자신의 글씨를 달게 했다.

원교 이광사는 동국진체(東國眞體)의 대가였으나 당시의 추사는 자신의 감각과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이는 오만함으로 가득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9년의 힘든 유배생활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른 추사는 “지난번에는 내가 잘못 생각하였다”며
자신의 글씨를 내리고 다시 원교의 글씨를 걸게 하였다. 고통의 시간을 겪으면서 추사는
좀 더 원숙한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삶의 어려움을 자신의 인격을 고양시키는 계기로
삼으려는 노력과 자신의 과오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정직함은 언제나 고귀하다.


*위 사진 : 대웅보전의 용머리와 계단 소맷돌의 돌사자

천불전이 있는 남원 옆에는 왜적의 침략으로 고통 받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승병을
이끌었던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처영대사의 진영을 봉안한 표충사란 사당이 있다.
서산대사를 호국불교의 선봉으로만 인식하게 된 것은 지난 70-80년대 군사정권의
정치적 교육 탓이긴 하지만 그 무엇이건 산문을 떨치고 일어나 장삼자락을 적의 피로
물들였던 서산대사의 숭고함에 티끌을 묻힐 수는 없겠다. 그러나 그는 승병이기에 앞서
철저한 수행자였다. 전란이 끝난 후 그는 홀연히 묘향산으로 떠나 은둔하였다.
수행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읽어본 그의 선시에는
우리 고유의 토속적인 서정이 흐르면서도 맑고 깨끗한 수도승의 정신이 서려 있었다. 

     덧없이 흐르는 외기러기  
     찬 그리매 가을 하늘에 진다.
     저문 산비 지팡이 재촉하고
     먼 강바람 삿갓을 벗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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