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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지난 국토여행기 4 - K형, 평화의 댐을 다녀왔습니다

by 장돌뱅이. 2012. 7. 3.

2005년의 여행기입니다.
다시 읽어보니 요즈음 저들이 말하는 '잃어버린 10년' 의 기간이어서인지
부정한 독재 정권을 이겨내고 이루어낸 정치적 민주화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결코 '10년'만으론 이룰 수 없을 만큼
우리 사회의 해묵은 구태 세력의 토대가 만만치 않았음에도 말입니다.

다시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하는 요즈음, '잃어버린 10년', 그 이전의
언어와 모습들이 되살아고 있는 듯 합니다.
'문제가 있어도 돈만 벌어주면 안되냐'는 천박한 논리를 우리가 선택하고
부터, 분단 반세기 만에 겨우 숨통이 틔였던 남북의 관계는 얼어붙고,
이른 바 '좌파'에 대한 공격을 '국민윤리'로 착각하는 '매카시'의 후계자들이
활개를 치며, 사법부와 언론은 권력의 눈치를 보는, '7080'으로의 복고풍?이 대단합니다.

국민을 우롱한 거짓 '평화의댐'까지 다시 나올까 걱정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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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도 프로야구를 결산하는 한국시리즈가 끝이 났습니다.
3연패에 몰린 두산팀에게 ‘포스’를 불어넣기 위해 마지막 날엔 아내와 회사직원들까지
동행하여 잠실구장을 찾았습니다. 모두들 외야응원석에서 목이 아프도록 소리를 질렀지만
결과는 아시다시피 삼성의 완승이었습니다. 승리의 환호성 속으로 패배의 아쉬움조차
스며들던 밤늦은 축제의 잠실운동장을 걸어 나오다 문득 반장님이 생각났습니다.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으니 편의상 그냥 K형으로 부르겠습니다.
그때 K형이 그랬다지요?
“어제 저녁 프로야구는 KBS에서 중계했는데...”  

그래요. 형을 불편하게 해드린 것은 제가 먼저였나 봅니다.
86년 어느 날 제가 아파트 현관문에 “상업광고 편파보도 KBS시청료를 낼 수 없습니다” 라고
쓰인 동그란 스티커를 붙였으니까요. 그 스티커는 ‘KBS시청료 거부 범국민운동본부’에서
만든 것으로 기억합니다. 울산에 와서 알게 된 한 기독교 단체의 후배로부터
전달 받아 일부는 회사 동료들에게 나누어주고 한 장은 제 아파트 문에도
붙였던 것입니다.

K형!
한동안 희화화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이른 바 ‘땡전’ 뉴스나 ‘뚜뚜뚜전’
뉴스를 아직도 기억하시겠지요. 상업광고방송과 국민들의 시청료로 엄청난 수익을
올리면서도 불법적인 정권의 나팔수가 되어 권력의 치부를 가려주고 국민의 눈을 멀게
만들려고 했던 그 시절 우리 방송의 범죄행위를 풍자했던 유행어를 말입니다.

예수를 재판할 때도 기실 군력은 '관제언론'을 동원한 여론몰이를 벌였다고 하던가요?
"진실을 전달하고 하느님의 공의를 세우며 겨레의 유구한 발전을 위해서 기도
하고 행동하는 것"을 기본적인 선교적 사명으로 하는 종교계가 시청료거부운동에
앞장서고, 시민들이 동참하여 추한 모습으로 몰락해가는 방송에 경고를 던진 것은
정당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즈음에 인기가 있었던 프로야구의 중계가 자주 있었고 야구를 좋아하던 아내와 나는
가끔씩 그것을 재미있게 보곤 했습니다. 그런데 한달에 한번씩 있던 아파트 주민
공동 아침청소 시간에 K형이 아내에게 다가와 물었던 것입니다.
“어제 저녁 프로야구 보셨어요?”
아마 전날 저녁의 게임이 굉장히 드라마틱한 역전으로 끝이 난 명승부였을 것입니다.
시청료거부 스티커를 문에 붙인 후 무언가 다소 소원한 눈치인 듯한 K형의 접근에
아내는 내심 반색을 하여 그렇다고 대답을 하였고 형은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이 좀
묘한 어투로 “어제 저녁 프로야구는 KBS에서 중계했는데...” 하곤 아내 곁을 떠났다고
합니다. K형의 ‘유도심문’에 아내가 걸려들었다고 해야겠지요. 


*위 사진 : 2005년 한국시리즈 우승팀 삼성의 축하행사

K형도 아셨겠지만, 86년 그 때 저희 부부는 결혼 2년 차의 신혼부부였고 울산에 직장을
따라 서울에서 내려온 터라, 주위에 먼 일가친척은커녕 친구도 한명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나마 저는 직장에 출근하면 동료들과 어울릴 수나 있었지만, 하루 종일 집에서
겨우 만 한살의 딸아이와 씨름을 하며 지내야 했던 아내는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이웃이 대인관계의 전부였기에 되도록이면 이웃이며 아파트 통로의 반장이었던
K형과도 좋은 관계를 맺고 싶었을 겁니다. 울산이란 공업도시가 외부에서 유입된 인구가
많을 수 밖에 없는 지역이니 K형도 혹 그런 처지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이웃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것은 누구나 같은 마음이겠지만
말입니다. 그 때문인지 아침 청소 시간의 일을 전하는 아내에게서 K형에 대한 불쾌한
감정은 묻어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는 철부지들처럼 킬킬거리며 웃기까지 했습니다. 

시청료거부 스티커가 반장이었던 형에게 내가 모르는 어떤 곤란함을 주었던 것인지
아니면 국가시책에 적극 참여하는 ‘건전시민’으로서 형의 평소 주관과 어울릴 수 없었던
것인지는 그때도 지금도 모르는 일입니다.
만약 전자의 경우였다면, 그런 하찮은 일에 그것도 정식 공무원도 아닌 반장이라는
봉사원에게까지 어떤 부담을 준 당시 정권의 치졸함과 집요함에 지금도 냉소적이 됩니다.
그들은 시청료거부 운동의 순수성을 시비하여 참여하는 단체와 국민을 불온세력으로 모함하고
운동에 대한 보도통제를 지시하는 한편 스티커의 배포를 경찰력을 동원하여
방해하기도 했으니까요.

K형!
혹 아십니까? 아내에게 그 말을 전해 듣던 저녁 제 손으로 그 스티커를 떼어버렸다는
사실 말입니다. 몰랐다고 해도 상관없는 일이겠습니다만 사실입니다.
5공이라는 폭력정권의 대항하는 무기로서 시청료거부라는 운동은 너무 ‘깔끔해’ 보인다는
생각은 한 적이 있지만 그런 것을 심각히 고민할 만큼 열혈 활동가도 아닌 터라
저의 행동은 운동의 효과 유무에 따른 판단이 아니라 다분히 아내와 K형의 관계개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 때문에 고향을 떠나 낯선 객지에서 생활하게
된 아내에게 이웃과 소원한 관계를 인내하라고 요구하기가 미안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가당찮은’ 이웃을 둔 덕에 다른 곳의 반장보다 피곤할지도 모를 형의 얼굴이
떠오른 것도 한 이유가 되겠습니다. 문득 그 모습이 회사라는 조직 속에서 어쩌면
일상적으로 지니고 있는 바로 나의 얼굴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위 사진 : 금강산댐의 '물폭탄'을 보도하는 당시 신문(출처: 네이버)

그러나 스티커를 떼어낸 뒤에도 형과의 관계는 가까워지지 못했습니다.
불과 며칠 뒤 발표된 5공 정부의 뜬금없는 발표 때문이었습니다.
‘북한이 서울을 삽시간에 쓸어버릴 목적으로 200억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가공할 위력의 금강산댐을 건설하고 있다’는 기상천외의 내용이었습니다.
이 나라 모든 신문과 텔레비전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연일 북한의 ‘수공(水攻)작전’에
대한 공포를 증폭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금강산댐을 터뜨리면 서울은 일시에 물에 잠기게
된다는 것이고 텔레비전의 화면 속에서는 반 이상이나 물에 잠긴 63빌딩은 모형이
위태로운 모습으로 기울어지고 있었습니다. 각종 관제규탄대회가 줄을 이었고
이 나라의 ‘석학’들이 모여 머리를 맞댄 끝에 만들어낸 대책은 K형도 잘 알고 계시다시피
금강산댐에 맞선 대응댐을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름 하여 ‘평화의댐’이었습니다.
그를 위해 인기 연예인까지 동원한 방송의 집중적인 선전선동으로 돼지저금통을 들고 나온
유치원생들부터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노인에 이르기까지
자발적, 타발적, 계획적, 우발적 온갖 성금이 거두어졌습니다. 


*위 사진 : 마무리공사 중인 평화의 댐 외부 전경

형과의 불편한 일은 그 과정에서 일어났습니다.
당시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에서는 다른 회사들처럼 전 직원의 월급에서 일괄적으로
얼마씩의 금액을 사전에 갹출하여 성금을 냈습니다. 그것은 9시뉴스 말미에 나오는
오늘의 성금 소식에 ‘무슨무슨 그룹 임직원 일동’이란 자막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형이 내가 출근 후 아내 혼자 있던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형은 주민 이름으로 성금을 모으려고 한다고 했고 아내는 남편이 회사에서 이미 낸
성금을 중복해서 낼 필요가 있겠느냐고 정중히 거절했던 것입니다.
아마 내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동일한 말을 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무슨 굉장한 의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박정희정권시절부터 국가안보의
명분으로 자신들이 처한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위정자들의 뻔한 술책에
식상을 했기 때문입니다.
결코 K형에 대한 불신과 거절은 아니었습니다. 


*위 사진 : 댐으로 오르는 길

그러나 형은 아내의 말에 속이 많이 상했었나봅니다.
아니면 ‘말이 통하지 않는’ 젊은 부부를 구제불능으로 생각했던지 형은 우리가 세 들어
살던 아파트의 주인을 찾아갔던 모양입니다. 며칠 뒤 시내에서 장사를 하고 있던 사람 좋은
집주인은 저희에게 찾아와 “요즈음 사시기가 어떠시냐?” 고 의례적인 듯한 인사를 건넨
후에 이번 주민 성금은 자신이 대신 냈다며 앞으로는 좀 그런 일에 협조해주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말을 조심스럽게 남기고 갔습니다. 당시 저희 부부에게는 매일 저녁 9시
텔레비전 첫 뉴스에 나오는 최고 권력자보다 겁나고 어려웠던 집주인이 말입니다.
얼마 뒤 우리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고 지금까지 형과의 허심탄회한 화해의 자리는
만들어지지 못했습니다. 


*위 사진 : 댐의 안쪽 - 물을 저장하는 쪽 풍경

K형!
늘 먹고사는 일만으로 허우적거리느라 민주화라는 거대한 가치를 위해 몸을 던지거나
삶을 걸고 부당한 권력에 맞선 경험을 저는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내가 그 시절의 권력을 증오하는 것은 그 무슨 대의를 기준으로 하기에 앞서
그것이 K형과 우리 부부의 만남 같은 일상조차도 철저하게 왜곡시키고 찢어놓았다는
지극히 작은 사실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에 양처럼 순하게 혹은 쥐처럼 겁 많게
살아가는 소시민일지라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마지막 가치라는 것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위 사진 : 평화의댐으로 가는 길은 가파른 산을 넘고, '최북단 최고봉 최장터널'을
통과해야 하는 힘든 길이었다.

K형!
얼마 전 아내와 그 ‘평화의 댐’을 다녀왔습니다.
한강을 따라 북으로 북으로 올라가 “구름이 가까워서 옷이 젖을”(동국여지승람) 만큼의
높은 산을 넘어야 하는 곳에 평화의 댐이 있었습니다. 행정구역상으론 강원도 화천군에
위치합니다.

아내와 내가 그곳에 갔을 때는 댐 보강을 위한 막바지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7백억원에 가까운 국민성금을 포함한 막대한 국고를 투입해 1988년 1차 공사를 마친 뒤
정권이 바뀌면서 방치되었던 평화의 댐은 2000년대에 들어 북한측 금강산댐
(정식 명칭 임남댐)의 안전도 문제가 제기되고 홍수조절의 필요성이 제기 되면서
증축공사가 재개된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기의 유적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가 하는 것은 가치관의 문제이자
미래에 대한 전망의 문제라고 합니다. 평화의 댐에 대한 추가공사가 진행된다고 해서
거짓과 기만으로 시작된 평화의 댐의 ‘원죄’를 파기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당장 서울이 물에 잠길 것처럼 정부가 호들갑을 떤 지 17년만인 2002년에야 비로소
금강산 댐은 완공되었으며 실제 저수 용량도 26억톤이라고 합니다. K형과 우리 부부가
마찰을 빚던 당시의 정부 발표 ‘200억톤 물폭탄’에 비하면 8분의 1 수준입니다.
그리고 그것도 남한에 대한 공격용이 아니라 절대 부족한 전력과 동해안 지역의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북한 자체의 필요성에 의해 건설된 것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평화의 댐의 시작은 부정한 권력이 분단 상황을 이용하여 국민을 상대로 벌인
거대한 사기극이자 한편의 코미디였던 것입니다.

K형!
20년이나 세월이 지나고 이미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그 시절의 이야기를 다시
들추어내어 은근히 지난 날 우리 부부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형과의 불편했던 과거에서
심리적인 판정승(?)을 얻고자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아내와 저에게 그 시절은 이제 다만 지난 시절의 기억으로 따뜻할 뿐입니다.
그것은 세월이 만들어낸 풍화작용으로 옛 감정이 무뎌져서 만이 아니라 그동안
우리 사회가 그 시절을 덤덤하게 혹은 재미있게 돌아볼 수 있을 만큼의 민주화를
이루어냈다는 의미도 되겠습니다.

K형!
평화의 댐은 부정한 정권에 의해 거짓의 굴레를 쓰고 태어났지만 그들이 생각하지
않았던 한 가지 문제를 우리에게 일깨워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분단된 국토에
대한 남과 북의 독자적인 개발은 국토의 기형화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상대방에 대한 악의적인 의도가 없는 각자의 필요에 의한 개발이라 해도 말입니다.
북은 금강산댐의 완공으로 압록강 수풍발전소보다 큰 발전량을 얻게 되었고 댐의 물길을
동해로 돌려 해당지역의 물부족 현상을 해결한다고 합니다. 그것을 비난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문제는 남쪽에게 남는다고 합니다. 남쪽의 북한강으로 저절로 흘러들던 물의 양이
연간 7억톤 정도 줄어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결과를 낳을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만
적어도 ‘물폭탄’이건 ‘물부족’이건 남북이 국토의 개발에 있어서도 머리를 맞대야
한다는 사실은 깨닫게 됩니다. 


*위 사진 : 북한가에 줄지어 선 많은 댐 중의 하나인 춘천의 의암댐

아시다시피 북한강 물줄기를 따라 지어진 많은 댐들 - 북쪽에서부터 화천댐, 춘천댐,
소양강댐, 의암댐, 청평댐 등 -에서 보듯 북한강은 최대의 수력발전지대이고 또 남쪽
사람들의 식수원이 되는 소중한 자원입니다. 더군다나 금강산에서 발원하여 강원도를
관통하여 의암댐에 이르기까지 북한강물은 싱싱한 1급수를 유지하여 강에 생명을
깃들이게 하는 생명수인 것입니다. 이렇듯 남북으로 분할된 파편적 시각이 아닌 전체적인
시각으로 한반도란 국토를 조망하는 일은 서로에게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남과 북은 더욱 가까워져야 합니다.
그것은 역사적 당위에 앞서 우리의 온전한 삶을 위한 아주 현실적인 필요이기도 합니다. 


*위 사진 : 유장한 북한강의 흐름. 오른쪽으로 멀리 보이는 곳이 춘천이다.

K형!
형과의 지난 일을 떠올리다가 이야기가 너무 거창하게 흘렀나봅니다.
늦은 안부를 묻습니다.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내가 그렇듯 형도 그 시절의 어색한 우리 관계를 떠올릴 때마다 미소를 지으리라 믿습니다.
좋았던 나빴던 지나간 모든 일은 저마다 소중한 자산이자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그때 우리의 어색함이 결코 우리의 서투름 때문만은 아니었잖습니까?
언젠가 어느 길모퉁이를 지나다 우연히 마주서게 되면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반갑게
서로의 등을 두드려 봅시다. 돼지고기 몇 점에 소주까지 곁들일 수 있다면 더욱 좋구요.
단풍과 하늘빛이 너무 고운 가을입니다.
가족들과 더불어 늘 건강하시길.

서울에서
장돌뱅이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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