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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내가 읽은 쉬운 시 112 - "로드킬"에 관한 두 편의 시

by 장돌뱅이. 2019. 5. 30.

*황윤 감독의 로드킬(2008)에 관한 다큐영화 『어느 날 그 길에서(ONE DAY ON THE ROAD)』

갑자기 앞차가 급정거했다. 박을 뻔했다.
뒷좌석에서 자던 아이가 밖으로 굴러 떨어졌다.
습관화된 적개심이 욕이 되어 튀어나왔다.

앞차 바로 앞에서 한 할머니가 길을 건너고 있었다.
횡단보도가 아닌 도로 복판이었다.
멈춰 선 차도 행인도 놀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좁고 구불구불하고 한적한 시골길이었다.
걷다 보니 갑자기 도로와 차들이 생긴 걸음이었다.
아무리 급해도 도저히 빨라지지 않는 걸음이었다.
죽음이 여러 번 과속으로 비껴간 걸음이었다.
그보다 더한 죽음도 숱하게 비껴간 걸음이었다.
속으로는 이미 오래전에 죽어본 걸음이었다.
이제는 죽음도 어쩌지 못하는 걸음이었다.

느린 걸음이 인도에 닿기도 전에 앞차가 튀어나갔다.
동시에 뒤에 늘어선 차들이 사납게 빵빵 거렸다.

- 김기택의 시, 「무단 횡단」-

교통사고에 관한 강의를 들었다.
연도별 사고 발생 건 수, 부상자 수와 사망자 수 등의 통계치보다 실례로 보여주는 사고 순간의 동영상이 더 끔찍했고 전율스럽게 다가와 탄식과 비명을 질렀다. 교통사고에 대한 경각심을 충격적으로 일깨우기 위한 강사의 의지가 반영된 편집이었을 것이다.

화면 속에서는 건조한(?) 숫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부모와 부인과 남편과 누이와 형과 친구들이 사소한 실수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차의 질주에 부딪히거나 깔리고 있었다. 차는 편리한 도구가 아니라 도로의 지배자였고 무감정의 잔인한 '터미네이터'였다. 길을 만들고 차를 만든 사람들은 다만 '자유로운 교통을 방해하는 가장 큰 방해물'처럼 보였다.

차는 도로에서뿐만 아니라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생활 전반을 지배하는 거대한 권력이 되었다. 차는 도로와 마을의 형태를 변화시켰다. 차는 대량 소비를 촉진시켰고 대형마트를 등장시켰다. 차는 휴식과 놀이의 형식과 내용도 바꾸었다. 시간을 단축시키고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변화시켰다. 도시뿐만 아니라 국토 전체가 차량의 신속한 이동을 전제로 계획되고 변모되었다.

하지만 넓어진 도로 대신 사람들의 생활공간은 갈라지고 단절되고 좁아졌다. 우리를 먼 곳까지 손쉽게 데려다주지만 그런 이동이 지역 간의 활발한 소통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도로 위에는 차량의 숫자만큼의 고립된 공간이 달리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차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다. 자동차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며 산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하여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길의 주인이 아니다.
길 위에 서면 몸가짐을 조신하게 하고 차에게 길을 내주며 그에 대한 '예절'을 표해야 한다. 자연에 기대어 사는 순진무구한 야생의 생명들을 죽이는 무자비한 "로드킬 ROADKILL"은 동일하게 인간들도 비켜가지 않기 때문이다.

한밤중, 누워 있던 검은 아스팔트가
벌떡 일어나 먹잇감을 찾아나선다
콜타르를 칠한 벽처럼 빗물에 번들거리는 몸,
속에서 먹을수록 커지는 허기가
컹컹, 인접한 산을 향해 짖고 있다
나흘 끼니를 건너뛴 아스팔트
제 몸 무두질하며 달리는 차량들
돌돌 말아 혀 안쪽으로 삼키고 싶다
공복이 불러온 뿌연 안개 속
검은 아스팔트가 바퀴를 굴리며 달리고 있다
질주의 관성은 중력이 낳은 사생아
아스팔트 등에 올라탄
재규어와 쿠거, 바이퍼, 머스탱, 스타리온,
갤로퍼, 라이노, 포니, 무소 들이
꽥꽥 비명을 지를 때마다
와들와들 산천초목이 떤다
산을 빠져나온, 길 잃은 본능을 잡아먹고
점점 더 난폭해지는 아스팔트
고삐 풀린 저 무한 질주를 아무도 막을 수 없다

- 이재무의 시, 「로드 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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