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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내가 읽은 쉬운 시 117 - 김수영(金秀映)의 「오래된 여행가방」

by 장돌뱅이. 2019. 6. 22.

아내와 여행을 하면서 간단한 기념품을 사곤 했다.
여행지를 주제로 한 그림이나 인형, 미니어쳐, 책, 사진엽서, 차(茶) 등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눈에 보이는 대로 마음에 드는 것을 그때그때 사서 모았다.
여행에서 돌아와 눈에 잘 띄는 곳에 그것들을 걸어놓거나 늘어놓고 오며가며 바라보면
즐거웠던 여행의 여운이 감미롭게 이어졌다.

그러다가 수집품에 좀 더 실용적인 목적도 더해보자는 취지에서 컵으로 바꾸었다.
음료나 커피를 마실 때 그 컵을 사용하며 여행의 추억을 떠올려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컵은 모양도 크기도 색도 여행지만큼이나 다양했다.
나중에는 한두 개씩 사던 스타벅스의 컵으로 시나브로 촛점이 맞추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저것 혹은 이런저런 이유로 점차 기념품이 늘어났다. 
그러지 않아도 비좁은 집의 공간이 부담스러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컵에서 마그넷으로 수집 품목을 바꾸었다. 그런데 마그넷 모음판으론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마그넷이 많아지면서 이젠 더 이상 모으지 않게 되었다.



기념품 수집과 상관없이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
특별한 이벤트나 기억할 만한 일이 없어도 '침목을 밟고 가는 기차처럼 자그락거리면서도' 삶이 계속되듯이.

언젠가 아내와 내가 들고온 '여행 가방'이 "어느 외딴 간이역에서 빈 자리를 남긴 채 내려버린 세월들"로
먼지만 풀썩일지라도 여행이건 삶이건 결국 저마다의 가방 속에 '기념품'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곱게 말린 꽃
" 같은 추억을 모으는 것이라 생각한다.
동명이인의 또 다른 시인 김수영(金洙暎)이 말하지 않았던가.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고. 

 스무살이 될 무렵 나의 꿈은 주머니가 많이 달린 여행가방과 펠리컨 만년필을 갖는 것이었다.
만년필은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낯선 곳에서 한번씩 꺼내 엽서를 쓰는 것.

 만년필은 잃어버렸고, 그것들을 사준 멋쟁이 이모부는 회갑을 넘기자 한 달 만에 돌아가셨다.
 아이를 낳고 먼 섬에 있는 친구나, 소풍날 빈방에 혼자 남겨진 내 짝 홍도, 애인도 아니면서
삼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은 남자, 머나먼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한 삼촌···
 추억이란 갈수록 가벼워지는 것. 잊고 있다가 문득 가슴 저려지는 것이다.

 이따금 다락 구석에서 먼지만 풀썩이는 낡은 가방을 꺼낼 때마다 나를 태운 기차는 자그락거리며
침목을 밟고 간다. 그러나 이제 기억하지 못한다. 주워온 돌들은 어느 강에서 온 것인지, 곱게 말린
꽃들은 어느 들판에서 왔는지.

 어느 외딴 간이역에서 빈자리를 남긴 채 내려버린 세월들. 저 길이 나를 잠시 내려놓은 것인지,
외길로 뻗어 있는 레일을 보며 곰곰 생각해 본다. 나는 혼자이고 이제 어디로든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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