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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내가 읽은 쉬운 시 119 - 유홍준의「우리집에 와서 다 죽었다」

by 장돌뱅이. 2019. 6. 25.


용인의 SALAFARM과 서울 먹거리창업센터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가져온 화분 두 개.
상추와 애플민트가 우리집에 와서 죽거나 죽어가고 있다.
상추는 좀 예민한 품종이라 해서 교육 받은 대로 나름 신경을 썼으나 황달기가 도는가 싶더니
이내 이파리를 눕히고 자리보전을 한 끝에 일어서지 못해 화단에 묻어주었다.
그다지 신경을 안 써도 잘 자란다고 해서 가져온 애플민트도 잎이 흑갈색으로 말라 떨어지는 모양이 다시
건강해질 것 같지 않다. 응급처치로 교육 중 나눠준 커피찌거기로 만든 거름을 주었으나 그다지 효험이 없어 보인다.
나의 무지함과 부실한 보살핌에서 비롯된 것이라 안타깝다.

생각해 보면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있다.
매일 부엌에서 만드는 음식도 따지고 보면 무언가 죽은 '재료'이지 않는가.
개구장이 우리에게 밥상을 차려주시던 친구 부모님의 별세 소식은 우리 나이에 흔하다.
어떨 땐 같은 또래 친구의 갑작스런 부음을 받을 때도 있다.
얼마 전엔 가까운 겨레붙이를 떠나보내는 아픔을 아내와 인내해야 했다.

산다는 건 죽음과의 공존이다.  누구나 죽지만 누구나 살아가고 있다.
일상 속에서 삶의 유한함을 자각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보다 겸손해지는,
무리한 욕심의 허망함을 깨닫을 수 있는 기회가 비례하여 늘어날 것이다.
나아가 죽음이 단절과 종말의 비애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과의 나눔이자 탄생을 위한, 
생명 본래의 연대와 확장 운동의 한  과정이라는 지혜로움에까지 다다를 수 있다면
삶은 더 자유로워지고 열정적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의 내공으로는 감히 언급하기조차 힘든 아득한 경지이다. 끝내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다만 흉내라도 내볼 수 있기를 자주 신에게 갈구할 뿐이다.
생의 마지막 그 순간 "별일 없냐?"라고 그가 물을 때 "별일 없어요." 라고 대답할 수 있도록.
그렇게 능청스러워질 수 있도록.


벤자민과 소철과 관음죽
송사리와 금붕어와 올챙이와 개미와 방아깨비와 잠자리
장미와 안개꽃과 튤립과 국화
우리집에 와서 다 죽었다

죽음에 대한 관찰일기를 쓰며
죽음을 신기해하는 아이는 꼬박꼬박 키가 자랐고
죽음의 처참함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듣는 아내는 화장술이 늘어가는 삼십대가 되었다

바람도 태양도 푸른 박테리아도
희망도 절망도 욕망도 끈질긴 유혹도
우리집에 와서 다 죽었다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별일 없냐
별일 없어요
행복이란 이런 것
죽음 곁에서
능청스러운 것
죽음을 집 안으로 가득 끌어들이는 것

어머니도 예수님도
귀머거리 시인도
우리집에 와서 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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