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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내가 읽은 쉬운 시 120 - 김정환의「닭집에서」

by 장돌뱅이. 2019. 6. 28.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달력에 앞서 자연의 변화를 보며 씨를 뿌리거나 수확하는 시기를 감지한다고 한다.
감꽃이 피면 올콩을 심고
, 감꽃이 지면 메주콩을 심는다거나 진달래가 피면 감자를 심고
고추잠자리가 날면 배추를 심고, 옥수수의 수확 시기는 새 파먹은 자국을 보며 안다고 한다.

농민에는 못미치겠지만 비슷한 감각과 지식으로 아내는 제철의 식재료를 기억하여 일년 먹을 양식거리를 준비한다.
몇년 새 내가 부엌 살림을 한다고 수선을 피우지만 사실 상차림의 기본을 이루는 음식들은 여전히 아내의 손에서 만들어진다. 
유월만 해도 아내는 메실장아찌와 메실청을 만들고, 들깻잎을 절이고, 햇마늘을 갈아 냉동실에 저장하고, 오이지도 담궜다.
시기를 놓치면 할 수 없는 것들이라며. 

그러다보니 집에서 가까운 대형마트 대신에 가끔씩 재래 시장을 가게 된다.
아내 나름의 단골 가게도 있다. 최근에 아내와 난 시장 오가는 길을 아예 산책 코스 중의 하나로 정하기도 했다. 
시장에 가서는 필요한 물품을 바로 사지 않고 끝에서 끝으로 천천히  왕복하며 산책거리를 늘인다.
어물전과 채소전, 정육점과 닭집, 족발집과 국수집, 옷가게와 신발집, 잡화점에 시장 언저리의 난전까지
기웃거린다. 호떡이나 오뎅 같은 군것질을 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닭 한 마리 발을 벌린
채 기름 속에 펄펄 끓는 동안
이상히도 고요한 밤하늘 바라보며
아내와 나는 우리네 살림 살이에 대한 걱정을 한다
닭은 한 마리에 2천 5백원
하늘로 삐죽삐죽 솟아오른 노점상 천막들 사이로
바람이 불고 흔들리는 하늘에 별이 몇 개 간신히 반짝인다
아내와 나는 잠시 그것이 안타깝다
그러나 닭집 여편네는 임신중
백열등 빛이 질펀하게 흐르는 시장바닥
그녀는 칼솜씨 하나로 닭 모가지를 싹둑싹둑 자르며
피에 범벅진 손으로 자신의 아이를 키우고 있다
우리는 또 잠시 소스라쳤지만
뱃속의 피에 또 엉겨 있을 그녀의 아이가

태어나서 자기를 낳아준 백정어미를 탓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그녀의 당당한 표정에서 읽을 수 있다
아니 그 표정에 섞인 어떤 안간힘 속에서 읽을 수 있다 
바닥에 뿌려진 닭 내장 비린 내
닭이 죽어 그녀의 아이를 살리지 않는다면
그 칼은 언제라도 우리를 찌를 수 있다
우리가 별을 보고 있는 순간에도
칼은 무참하게 닭 배때기를 찌르고
아내와 나는 살림살이에 대한 걱정을 상관없이 한다
질펀한 시장바닥을 흘러가는 백열등 빛
머리에 두른 수건에 묻은 비린내가 코를 찌르고
별은 이제 하나도 안 보였지만
나는 그 여편네와 우리네 사이
어떤 인연처럼 끈끈한 (혹시 핏덩이 같은) 그 무엇이 치밀어
우리들을 맺고 있음을
백열등 불빛밖에 남은 것 없어도 알아차릴 수 있다
증오이거나 사랑이거나
소매 스치는 인연이거나 닭 배때기를 함께 찌르는 목숨의 뜻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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