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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발밤발밤 52 - 도산공원

by 장돌뱅이. 2019. 8. 20.






아내와 압구정동에서 시원한 건진국수를 먹고 도산공원을 산책했다.
도심 속 공원은 사막 속 오아시스와 같다. 공원에 드니 더운 도심과는 조금은 다른 참신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래서 숲은 언제 어디서나 옳다.

도산공원은 1973년에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있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묘소를 이장하여
부인과 함께 합장하면서
개원하게 되었다고 한다.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2」( https://jangdolbange.tistory.com/1876 )는 시를 쓴 유하는
 
그의 수필집 「이소룡 세대에 바친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 속에 나오는 압구정동이라는 공간은, 생명의 공간이 아니라 절멸의 자리이다. 건강한 노동의 공간이 아니라,
터미네이터의 관능과 파괴성이 도사린 자리이다. 내가 그와 같은 한국 자본주의의 상징적 공간을 시 속에 끌어
들인 것은, 맹목성 그 자체인 욕망의 다양한 모습을 반성하고, 그러한 스피드 문화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쉼의
문화를 제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작위의 결과인 도시. 그리고 그것을 부풀리고 지탱시키는 '위하여' 문화. 이를테면 더 많은 거주 공간을
위하여 아파트와 빌딩이, 더 빠르게 가기 위하여 자동차가, 더 깨끗한 물을 먹기 위하여 정수기가 만들어진다.
도시를 구성하는 것들은 모두, 그 무엇인가를 위하여 존재한다. 아니 도시를 구성하는 문화치고, 그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없다. 술잔을 부딪는 데까지 위하여는 동원된다. 그 위하여라는 목적론적 인식이
욕망의 대량복제를 정당화시키고, 결국 색과 맛과 음이 넘쳐나는 작위의 자리를 부풀려낸다. 그러한 대량복제
성질 때문에 위하여 문화는 본질적으로 스피드를 수반한다. 그러나 위하여 문화는 실상 아무것도 위하지 못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자동차는 더욱 교통을 마비시키고, 노래를 잘 부르기 위해 만들어놓은 가라오케 마이크는
진정한 의미의 '노래'를 망쳐버린다. 그리고 정수기는 더욱 더러운 물을 만들어낸다. (늘 오염은 정화의 스피드를
능가한다.) 이에 반해 내가 말하는 쉼의 문화란 유흥의 문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위하여 문화 자체를 반성하는
문화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욕망에 대한 게으름의 찬양이다. '위하여'라는 인간의 목적론적 인식이 지구의 허
(虛)를 거의 메워버린 지금, 우리가 찬양해야 할 것은 칼 루이스의 스피드가 아니라, 빈 곳을 '그대로' 두자는
노자적 게으름이다. 비어 있음은 작게는 쓰임의 공간이요, 크게는 생명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강남에, 그것도 압구정동 가까이에 있는 공원과 숲은, 유하가 지적한 대로
스피드문화에 대한  '쉼의 문화'이고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고 
'빈 곳을 '그대로' 두자는 노자적 게으름'의 공간이자 '생명의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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