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폰(AUAMPORN)은 90년 대 초 태국 거래처의 젊은 구매 팀장이었다.
공평하고 냉철한 일처리로 회사 내에서 능력을 인정 받았던
그녀는 물건을 팔아야 하는 내겐 매우 깐깐하고 까칠한 고객이었다.
매너는 좋았지만 쉽게 접근할 수 없게 거리를 유지하며 틈을 내주지 않았다.
어떨 때는 우리의 경쟁사에 발주를 하여 애를 태우기도 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인간적으로도 가까워졌지만 업무라는 공식적인 관계가 우선했다.
몇 년 후 그녀가 나의 영업과는 상관없는 회사로 옮겼다.
업무라는 형식이 사라지면서 우리는 편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우리가 티격태격 했던 지난 일은 비로소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그녀는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는, 나도 잘 아는, 성실한 청년과 결혼을 했다.
그 뒤 그녀가 서울에 왔을 때 함께 식사를 한 뒤로는 십년 넘게 만날 수 없었다.
나의 8년 가까운 미국 주재도 한 이유가 되었다.
물론 이메일과 문자 등을 통해 가끔씩 안부는 주고 받았다.
며칠 전 그녀가 가족 사진을 보내왔다.
아이들은 불쑥 컸고 나이에 비해 앳되 보이는 남편의 머리에도 어느 덧 흰 서리 내려 앉아 있었다.
올해가 가기 전에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다.
빠른 세월······ 편안한 사람들과는 자주 만나며 살아야하지 않겠는가.
백수가 되어서도 뭐가 그리 바쁜 것인가 잠시 내가 사는 모습을 생각해 보았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시 짓는 친구들과 함께 만든
죽란시사첩이라는 동인지의 머리말을 보면
"모임이 이루어지자 우리는 이렇게 약속을 하였다.
살구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인다
한여름에 참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인다
가을이 되어 서늘해지면 서지에서 연꽃을
구경하러 한 번 모인다
국화꽃이 피면 한 번 모인다
겨울에 큰 눈이 내리면 한 번 모인다
한 해가 저물 무렵에 화분에 심은 매화가
꽃을 피우면 한 번 모인다······"는 말이 있다
젠장! 시쓰는 친구들아
다들 잘 있느냐
가까이 살구꽃도 복숭아꽃도 참외밭도 없어서
이렇게 사느냐
매화 보는 대신에 곗돈을 부어서라도
얼굴 보고 목소리 듣자
죽란시사 혀 차는 듯한 소리
늦가을 비 내리는 창밖에서 들린다
- 나해철의 시, 「죽란시사첩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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