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당진시 신평면에 있는 신평양조장에 다녀왔다.
신평양조장은 1933년 이래 3대째 막걸리를 빚어온 명가이다.
창업주의 뒤를 이어 김용세 옹이 양조장을 지켜왔고
지금은 그의 아들 김동교씨가 물려받아 함께 꾸려가는 것 같다.
2009년에는 청와대 공식 만찬 막걸리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한 가지 일에 매진해온 사람들의 의미있는 노력에대한 당연한 사회적 반향이겠다.
술을 처음 입에 대본 것이 언제였던가?
동네 술도가에서 아버지 심부름으로 술을 받아오다 골목 어귀에서 한두 모금 스릴있게 마신 것이 처음인가?
아니면 모내기나 벼베기 때 떠들석한 잔치 분위기가 좋아 새참을 따라갔다가
동네 어른들이 장난삼아 건네주는 술을 못 이기는 척 받아마신 게 처음인가?
그것도 아니면 명절 때 술을 거르는 어머니를 졸라 조금 맛본 것이 처음인가?
모르겠다. 아무튼 내가 처음 맛본 술이 막걸리였던 것은 분명하다.
어릴 적 어른들이 그때그때 탁주(濁酒), 백주(白酒), 약주(藥酒) 등등으로 바꿔 부르는 탓에 헷갈리던
막걸리 - 어떤 이들은 '막 걸러 만든 술'이라 막걸리라고 한다면 막걸리의 과학적·미각적 의미와 가치를
낮추는 것이라며 흥분하기도 한다. 걸핏하면 술자리에서 느닷없이 일어나 "고려대학교 막걸리 대학교!" 하며
막걸리찬가를 부르곤 하던 후배녀석이 그랬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그런 막걸리의 의미에는 청주나 소주의 고급 전통주와는 다른 '민중친화적' 인
의미가 있다고 댓거리를 하기도 했다.
막 걸러서 마셔도 숙성을 거친 뒤에 마셔도, 무회주로 마셔도 물을 타셔 마셔도 된다는 것은
막걸리의 약점이 아니라 유연하고 넓은 스펙트럼을 의미하는 장점이겠다.
음식평론가 황광해씨는 진짜 문제는 우리 시대 막걸리의 천편일률적인 맛에 있다며
"모든 막걸리가 비슷한 감미제, 조미료를사용한다. 단맛과 감칠맛 일색이다."라고 했다.
옛날 우리나라는 집집마다 직접 술을 빚어 마시는 풍습이 있었다. 이를 가양주(家釀酒)라 했다.
'명가명주'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이런 가양(家釀 )문화는 우리나라의 다른 많은 전통과 마찬가지로
일제 강점기라는 질곡의 시기를 지나며 말살되었다.
일제는 세수를 늘리기 위하여 모든 술 제조에 면허제를 시행했고,
양조장 판매용 술보다 가정 제조 술에 더 높은 세금을 매겼다.
1934년에는 아예 자가 술 제조가 금지되었다.
그 결과 집집마다 전해오던 다양한 술이 사라지게 되었다.
막걸리는 찹쌀로 지은 고두밥과 물, 누룩 효모등을 섞어 만든다. 위 사진은 누룩과 효모이다.
신평양조장에 있는 거대한 목조 술통 - 옛날 부산양조장에서 사용하던 것이라 한다.
실습으로 만든 누룩전
막걸리도 다양한 칵테일이 가능했다.
준비된 재료를 단순 섞는 과정이었지만 직접 술도 담궈 보았다.
발효가 되면 걸러 아내와 나눌 참이다.
작고한 천상병 시인은 술을 좋아했다. 그의 시를 옮겨본다.
"술에 취하는 것은 죄다."라는 시인의 말에 뜨금해진다.
대학에 입학 한 이래 직장을 은퇴할 때까지 나는 너무 많은 그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서정주는 자신을 키운 것은 팔할이 바람이라 했지만 나를 키운 것은 팔할이 술이었다.
이제는 적게 마시리라 다짐해 보지만 그게 또 뜻대로 안 된다.
나는 술을 좋아한다.
그것도 막걸리로만
아주 적게 마신다.
술에 취하는 것은 죄다.
죄를 짓다니 안될 말이다.
취하면 동서사방을 모른다.
술은 예수 그리스도님도 만드셨다.
조금씩 마신다는 건
죄가 아니다.
인생은 고해苦海다.
그 괴로움을 달래 주는 것은
술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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