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교동 길을 걷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앞 쪽에 거짓말처럼 당신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정말 믿기지 않는 우연이었습니다만 제겐 그것이 놀라운 우연만은 아니었나 봅니다.
같이 활동하던 동아리 모임에서 유난을 떨던 평소의 치기를 접어둔 채 당신에겐 아무 말도 건네지 못했으니까요.
아무 낌새도 채지 못한 당신은 버스와 함께 떠나버렸고 저는 빈 보도블록을 발로 쓸며 정류장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 바보 같은 경험에 대한 자책이 용기를 촉발시켰을까요?
얼마 뒤 망설임 끝에 저는 투박하게나마 저의 마음을 당신에게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결혼35주년을 지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만남은 그날 무교동에서, 그보다 먼저 당신과 함께 하던 여름날의 농활이나 겨울철의 흰눈학교에서,
아니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아득한 시간 속에서부터 싹이 터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연이건 인연이건 필연이건 당신과 만나는 길목으로 이끌어준 모든 것들에 감사합니다.
쑥빛 제복의 황량한 '군바리' 시절, 당신이 넘어오던 아카시아 향기가 가득한 오월의 언덕과
허름한 단칸 셋방의 신혼, 출근 길의 제 어깨에 실어주던 당당하고도 따뜻한 당신의 시선과
함께 보낸 낯선 나라에서의 생활이나 먼 나라로의 즐거운 여행,
그리고 손자녀석의 첫 울음과 함께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 지난 축복에도 감사를 더합니다.
젊은 날 무교동에서 머뭇거린 고백을 여전히 기억하고자 합니다.
고백은 할수록 부족할 뿐이지만 그 부족함으로 저는 풍요롭게 부풀어 지냅니다.
당신이 군 제대 무렵에 보내주었던 책, 그 속에 있는 글을 빌려와 부족한 고백을 채워봅니다.
삶은 언제나 구비쳐 휘도는 물길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
삶은 구비치며 그대의 심장에 나의 심장을 잇대어
출렁거리는 물길로 이어왔느니
살지라!
삶은 고뇌요 일상은 부대껴 권태의 늪을 이뤄갈지라도
살아서 즐거움과 괴로움 함께 마시며
사랑하는 작은 몸부림 속에 함께 피로 흐르라
맥을 거쳐 다시 맥으로
심장을 나와 다시 심장으로
펄 펄 펄 솟구치는 피가 되어 흐르다가
어느 한 순간 삶을 거두고
미래의 문턱에 선다한들
천·지(天·地) 의 저울대가 무슨 그리 대수로운 논의 거리일 것인가
행여 윤회의 긴 회로에서
남자와 여자로 만나지 못하고
이름 모를 짐승으로 마주 으르렁대게
작정되었다 하더라도
사랑할지라!
사랑에서 사랑으로
펄 펄 펄 타오르며 우리가 배운 삶의 생명은
사랑,
사랑은 우리가 지상에 남길
유일한 발자취거니
- 채광석의 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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