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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전시회 "대한제국 황제의 식탁"

by 장돌뱅이. 2019. 10. 31.

덕수궁 대한제국 역사관 전시실에서 '대한제국 황제의 식탁' 특별전(09. 21. ~ 11. 24.) 이 열리고 있다.대한제국 황제의 상차림과 구한 말 서세동점의 시기에 변화된 대한제국의 식문화를 엿볼 수 있는 기회다. 함께 요리를 공부하는 동료들과 전시회를 보러 갔다.
10월
마지막 주 수요일이라 입장료도 공짜였다.

황제(왕)는 어떤 음식을 어떻게 먹었을까?

왕의 식사는 잔치 대의 대전어상(大殿御床)과 일상생활에서의 수라상으로 구별되었다.
대전어상은 외국 칙사를 맞이하거나, 왕이나 대비의 생일이나 국혼(國婚) 등의 궁중 연회 때 차리는 상이다. 당연히 가장 화려하고 특별할 수밖에 없겠다.

정조가 생모인 혜경궁 홍 씨의 회갑 때 차린 잔칫상의 경우, 약 45cm(1척5촌) 높이로 고배(高排:쌓아올림)한 음식이 70가지, 약 15cm(5촌)으로 고배한 음식이 12가지였다. 궁중음식은 연희에 참석한 고관대작을 통해 상류사회로 퍼져나갔다. 오늘날 돌잔치나 회갑연의 잔칫상에 음식을 높게 쌓는 풍습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왕의 일상적인 식사는 아침(조수라), 점심(주수라), 저녁(석수라) 외에 참참이 드는 간식과 아침 수라 이전에 가볍게 드는 죽수라([粥水刺)가 있다. 수라상의 반찬은 왕의 식성이나 기호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법식의 테두리 안에서 가능했다. 수라상은 반찬을 12개의 접시에 담아 차리는 12첩 반상이 기준으로 이는 왕과 왕비만 사용했다.
일반 사가에서는 9첩, 7첩, 5첩, 3첩 반상만 이용할 수 있었다.

'덕이 높고 오래 산다'는 뜻을 지닌 덕수궁(德壽宮)의 정문은 대한문(大漢門)이다.
원래 이름은 '크게 편안하다'는 뜻의 대안문(大安門)이었으나 1906년에 대한문으로 바꾸었다.
'대한'(大漢)은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뜻이다. 대한문상량문(上樑文)에 나와있다. 일제가 '큰 (도적)놈이 드나든다'는 뜻으로 고의적으로 만든 이름이라든가, '漢'이 중국을 뜻하므로 '韓'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하는 주장은 근거가 빈약하다.

덕수궁은 일제가 본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파괴·매각·축소시켰다.
지금의 규모는 당초 규모의 절반도 채 안 된다. 왕궁이라기보다 작은 시민공원에 가깝다. 그나마 남아있는 부분조차 일제는 담장을 헐어 콘크리트 담으로 만들고 포플러, 은행나무 등을 심기도 하여 왕실과 국권의 상징성을 파괴하는데 주력을 했다. 

대한문을 들어서 금천교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中和殿)이 있다.
'中和'는 중용(中庸)에서 유래된 말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性情)'이라는 뜻이다. 중용에는 '희로애락이 발하지 않는 것을 中이라 하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和라 한다. 中은 천하의 근본이고 和는 천하의 공통된 도(道)다. 중화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에 위치하고 만물이 잘 길러진다'라고 하였다.
덕수궁과 대한제국의 비운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 거창한 의미의 이름이 덧없어 보인다.

<조일통상체결기념연회도>: 국권 찬탈이 시작된 불평등조약을 기념하는(?) 연회를 그린 그림이라 바라보기가 편치 않다.어쨌든 서양식 식탁에 서양식 식탁 용구들이 보인다.
대한제국의 만찬 공간인 대식당.

영국 왕립지리학회 최초의 여성회원이었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는 1894년부터 4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했다. 그리고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KOREA AND HER NEIGHBOURS』를 썼다. 여행 중 경복궁에서 고종과 명성황후를 알현하기도 했다. 알현에 앞서 식사를 대접받은 대목이 그 책에 나온다. 

8백여 명의 병사와 1천5백 명 정도의 수행원(내시와 궁녀)들, 온갖 임무를 띈 관리 ― 조신과 그들의 수행원들, 서기, 승지, 하인들 등으로 궁궐이라는 이 광대한 울타리 안은 마치 혼잡하고 조밀한 도시 그 자체인 듯싶었다. 호수 중앙에 멋있게 장식한 누각이 세워진 아름다운 인공호에 닿을 때까지, 우리는 거의 8백 미터 정도를 건축물 사이를 통과해서 걸어온 셈이었다. 이 근처에는 지은 지 별로 오래되지 않은 외국식의 궁과 당시 왕과 왕비가 기거하고 있던 단조로운 한국식 건물들이 있었다. 왕비가 기거하는 궁의 안뜰로 들어서는 문 앞에서 궁중 통역관과 내시들, 궁녀들과 궁녀들의 우두머리로 약간의 권세를 가지고 있는, 무척 기품 있는 차림새를 한 중년의 상궁이 우리를 맞았다.
노란색 비단이 드리워진 수수한 방으로 안내되어 우리는 곧 커피와 케이크를 정중하게 대접받았다. 그 후 저녁 식사 때는 상궁이 궁중 역관의 도움을 받아 아주 아름답게 꾸며진 식탁을 앞장서서 주도해 나갔다. 저녁 식사는 놀랍게도 서양식으로 차려졌다. 스푸를 포함해서 생선, 퀘일, 들오리 요리와 꿩 요리, 속을 채워 만든 소고기 요리, 야채 크림, 설탕에 버무린 호두, 과일, 적포도주와 커피 등등이었다.

석조전 정면 꼭대기에 '이화(李花) 문양'이 있다.
이를 두고 배꽃(梨花)이나 국화문양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지만 '오얏꽃문양'이다.
오얏은 요즈음 흔한 외래 자두가 아닌 토종 자두를 말한다.
조선 왕가의 성씨인 '오얏 리(李)'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된다.

'황제의 식탁' 전시회의 접시나 그릇에도 오얏꽃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흰 자기에 새겨진 문양이 깔끔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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