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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내가 읽은 쉬운 시 167 - 이사라의「밥의 힘」

by 장돌뱅이. 2020. 2. 20.


어제는
우수(雨水)였다. 눈이 녹아서 비나 물이 되는 날이다.

봄이 가까워졌다는 의미이겠으나 올겨울은 별로 춥지 않아서 계절을 구분짓는 절기(節氣)의 의미가 무색하다.

게다가 세상이 코로나바이러스로 근심이 가득하다.
더더구나 이즈음엔 아내의 상심마저 깊어 차라리 '우수(憂愁)'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작년 S와 이별한 뒤, 아직도 아내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여린 상처를 할퀴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놀랍게도 가까운 사람의 행태라 아내가 더 아파하는 것 같다.
이별의 과정에는 냉담했으면서도 슬픔이나 추억은 과장하고 그마저도 홀로 독점하려 한다.
조악하고 부끄러운 생리를 정작 본인은 인정하지 않는다..
가장 뜨거운 기쁨도 가장 통절한 아픔도 사람으로부터 온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피해 가라는 옛말은 이럴 때 올바른 행동수칙이겠다.

계절이 흐르듯 '이 또한 지나가고' 아내가 이겨내주길 바랄 뿐이다. 그럴 것이다. 
우선은 아내를 밥상 앞으로 이끌고 오래 앉혀두는 게 내가 할 일이다. 
냉잇국과 쑥국에 이어 봄동 겉절이를 만들어 보았다. 

이사라 시인의 시는 겨울에서 봄이 아니라 가을에서 겨울을 배경으로 하지만
우수(雨水)에 읽는다고 해서 수선스런 계절을 넘는 끈끈한 밥과 사랑의 의미가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가을이 가고 겨울 오는 길이 서늘합니다
며칠 동안 그 길에서 심하게 앓고 있습니다
한 마음과 한 마음 사이를 무사히 지나기가 어렵다고
몸에게 말해주는
() 하나가 그렇게 서늘한 기운으로 지나갑니다
신열로 오르내리는 세상이
어쩌면 몸속에 남은 마지막 힘인 듯 제게 느껴집니다
계속 그 길 따라 걸어가면
집들이 서릿발 꼿꼿한 창문을 달고
겨울은 그렇게 얼어가겠지만
창문 너머 저기 저 부엌의
밥솥 안에서는
둥근 맨얼굴들이 송글송글 땀을 흘리고 있을 테지요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면
한고비 넘긴 몸이
밥솥 안의 끈기처럼 밥의 힘을 믿는 사람과 함께
더 둥글게
또 한세상을 지나갈 것입니다

- 이사라의 시, 「밥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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