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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내가 읽은 쉬운 시 170 - 이중기의「꽃은 피고 인자 우예 사꼬」

by 장돌뱅이. 2020. 3. 7.

 


며칠 전 집 근처 마트에 갔다가 길게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무슨 상황인지 짐작이 갔지만 정말일까 하여 물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마스크를 사기 위한 줄이었다.
"이렇게 줄서서 한 시간을 기다려도 살 수 있는 게 몇 개 안되요."
바이러스가 불러온 우울한 풍경.
기능성 마스크 하나 없이 지내는 아내와 나의 생활이 새삼 위태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올 겨울은 유난히 따뜻해서 봄이 일찍 온 것 같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최근 몇 년에 비해 미세먼지도 없는 날이 많다.
누군가 중국 본토의 공장 가동율이 떨어져서 그렇다고 했다.
정확한 진단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이라 해도 여러가지 측면에서 반갑지만은 않다.
결국은 바이러스 때문이라는 말이므로.

경칩날.
환기를 위해
앞뒤 문을 활짝 열어보았다.
얼굴에 와닿는 바람만큼은 계절에 걸맞게 싱그러웠다.
밖을 내다보니 햇볕 가득한 운동장에서 공을 차를 타는 아이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모든 봄의 활기를 억누르며 갇혀 지내야 하다니.
어린이집이 문을 닫아 집에서 지내야 하는 네 살박이 손자친구가 바라는 건
밖으로 나가 신나게 자전거와 미끄럼과 그네를 타는 것이다.
그리고 놀이터에서 우리
둘이서 개발한 '선장놀이'를 하는 것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믿고 싶지만,
계획했던 그까짓 여행이야 취소하고 또 다른 날을 기다리면 되지만,
혹시나 이런 
'잠시 멈춤'으로 지내다 정말 봄꽃이 흐드러지면 '인자 우예 사꼬'.


꽃은 피고 인자 우예 사꼬
문을 열면 능금밭 가득 능금꽃이 아짤하게 피어 있는
그 풍경 아득하게 바라보며 비명을 치는 노파
어깨 한쪽 맥없이 문설주로 무너진다
그 모습 힐끗 일별하던 네 살박이 손주놈이
되돌아오는 메아리처럼 중얼거리며 나자빠진다
꽃은 피고 인자 우예 사꼬

- 이중기의 시,「꽃은 피고 인자 우예 사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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