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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부활 이전에 삶과 죽음이 있었다

by 장돌뱅이. 2020. 4. 15.


*텔레비젼 화면 촬영


부활절.
냉담을 한 지 오래라 쑥스럽지만 몇몇 교우들에게 "부활 축하합니다"라는 인사를 보냈다.
교리를 지도해 주신 수녀님의 "냉담의 기간에 상관없이 한번 신자는 영원한 신자"라는 
해병대 구호 같은 말씀을 뻔뻔함의 근거와 위로로 삼으면서.

아내와 함께 텔레비젼으로 중계되는 교황 집전의 바티칸 미사를 보았다. 


*카라바조의 「무덤에 내림」(1604)


부활 이전에 죽음이 있었다.

요셉이 용기를 내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내어 달라고 청하였다. (중략)  요셉은 시체를 내려다가 
미리 사가지고 온 고운 베로 싸서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에 모신 다음 큰 돌을 굴려 무덤 입구를 막아 놓았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를 모신 곳을 지켜 보고 있었다.
- 공동번역 성서, 「마르코」 15:43~47 -

쓸쓸한 예수의 장례식이었다.
무리를 지어 따르거나 환호하던 사람들은 물론 가족도 친척도 제자도 없었다.
그나마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마르코」서에서는 제자로 소개되어 있지 않은) 요셉이 
예수 동조자로 몰릴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 시신을 내달라고 빌라도에게 부탁해서 겨우 치러졌다.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예수는 체포 이후 처형에서 장례까지 철저하게 버려졌다. 재판은 권력과 광적인 여론의 합작으로 진행되었다. 
재판의 결과는 인간에게 최대의 고통을 가하고 그 시간을 최장으로 지속한다는 십자가 처형이었다.
그에 비하면 단두대는 고통의 시간이 짧다는 점에서 도리어 인간적(?)으로 여겨질 정도라고 한다.

십자가형은 로마제국이 정치범에게 내리는 형벌이다. 하지만 예수의 정치적 기록은 복음서에 정확히 나와있지 않다.
유대교 최고 권력층이 예수를 죽이려는 의도는 있었지만 십자가 처형은 오직 로마군의 권한이었다고 한다.
신성모독의 종교적 범죄라면 그 처벌은 유대 법정의 권한이므로 로마에 넘길 필요가 없다.
그런데 복음서의 기록은 예수의 죽음의 책임을 유대인에게 전가하고 로마군에게  면책을 주려는 듯한 인상을 준다.

왜 그랬을까? 결국 성서도 누군가 (한 사람이건 여러 사람이건) 사람에 의한 기록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목적으로 어떤 책을 썼는가'라는 다른 일반의 책에 적용하는 원칙들을 
성서에도 적용하며 읽을 수밖에 없다. 예수 죽음의 원인과 과정에 대한 복음서의 애매한 태도는 로마의 통치 아래서 
어려움을 이기고 생존을 이어가려는 초대 교회의 현실적 선택이었던 것은 혹 아닐까? 
어쨌든 분명한 것은 예수는 인간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부활의 종교적 의미가 무엇이든 
그 죽음은 마지막 걸친 옷까지 빼앗길 정도로  비참했다는 사실이다.



죽음 이전에 삶이 있었다.
부활을 생각할 때 예수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죽음을 생각할 때  삶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부활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영역이겠지만 삶은 인간의 영역이 포함한다. 부활의 기쁨과 환희가 아무리 크더라도, 
혹은 죽음의 절망이 아무리 깊더라도, 그것으로 삶의 의미가 평가절하 될 수는 없다.
그런데 왜 그런지 '예수살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미사 때마다 바치는 사도신경에 정작 예수의 삶은 생략되어 있다.

···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서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 

사도신경 속에서 예수는 태어나고 '그냥' 죽었다. 때론 호방하고 때론 자상했던 서른 살 무렵의 
청년 예수의 삶은 건너뛴 채 죽고 부활한 그리스도만 남아 우리를 심판하러 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실재했던 예수의 삶을 수시로 묵상하며 실재하는 인간들과 어울리는 관계 속에서 "말씀"을
실천하고 체험하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부활의 신비로움은 당위적 교리의 주입에서가 아니라 
결국 각자의 실존적 체험 속에서 감득(感得)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에.


예수가 선포하고 실현하고자 했던 하느님 나라를 명쾌하게 정리할 수 있는 신학적 지식이나 믿음이 냉담자인 내게 있을 리 없다. 
다만 계급과 세상의 편견에서 자유로웠던 예수의 평등한 밥상공동체와 병든 육신에 더해지는 지배세력의 종교적 정죄라는 
이데올로기를 벗겨버린 그의 치유의 행위에 공감할 뿐이다.

신앙이란 나의 상식적 인식의 지평을 넘어서는 타자(the Other)에 관한 모든 가능성을 포괄하는 것이다. 
그것의 제일의 조건은 타자 앞에선 나라는 실존의 겸손이다. 모든 신앙은 존재의 겸손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김용옥, 『도마복음』 중에서-


최근에 코로나19 사태로 유명하게(Notorious) 된 어떤 종교 단체에서 십만 몇명인가의 선별된 특혜자만이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천박한 논리로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또 다른 어떤 곳에서는 사회적 격리라는 과학적 건강 수칙과 
타인에 대한
배려를 종교 탄압으로 호도한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인간 삶의 합리성을 벗어난 종교만의 합리성은 없다. 
그들은 삶의 현실
에 바탕을 둔 하느님 대신에 자신들의 논리와 이해를 충족시키는 하느님을 그리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느님의 나라는 특별한 선민사상에 사로잡힌 자들이 만든 까탈스런 율법을 통과하거나 성전에 제물을 바쳐야 해야
다다를 수 있는 어떤 비밀스런 장소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시작해야 할
그 무엇 속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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