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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아르테미시아와 유디트

by 장돌뱅이. 2020. 3. 24.

*아르테미시아 젠텔레스키,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1620년경)

 

유디트(JUDITH)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여성이다. 유디트가 남편을 여의고 3년 넘게 천막을 치고 베옷차림으로 지낼 때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는 대군을 이끌고 그녀가 살고 있는 베툴리아로 쳐들어왔다.
도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유디트는 하녀와 함께 홀로페르네스의 막사를 찾아가 그를 유혹하여
술에 취하게 만들고 침실에서 목을 베어버린다. (임진왜란 때 진주의 논개를 생각나게 한다.)
많은 서양 화가들이 유디트의 일화를 소재로 화폭에 담았다. 
때로는 나라를 구한 영웅의 이미지로 때로는 남성을 유혹한 미모만을 강조하는 형태로.

위 그림은 이탈리아의 화가 아르테미시아(ARTEMISIA GENTILESCHI, 1593 -1652?)가 그린 유디트이다.
거기에는 애국심으로 충만한 거룩함이나 결연함, 혹은 '팜 파탈'의 치명적인 에로틱함은 없다.
오직 적장의 목을 칼로 자르는 살기와 분노만 가득하다. 
추호의 망설임도 없어 보이는 냉철한 표정과 힘주어 칼을 잡은 손이 섬뜩하다.

아르테미시아의 아버지 오라치오(ORAZIO GENTILESCHI)는 당대에 이름난 화가였다.
오라치오는 딸을 아카데미에 입학시키고자 노력했지만 당시 사회는 여성들에게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직접 딸을 가르치던 아버지는 동료이자 화가인 타시(TASSI)에게 딸의 그림 공부를 부탁한다.
그러나 타시는 그림을 가르치는 일에는 등한시 하고 그녀를 강간해 버렸다. .

오라치오가 타시를 고발했지만 법정에선 타시는 자신의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아르테미시아가 처녀가 아니었으며 이미 많은 남자와 관계를 맺은 난잡한 여자였다고 주장을 했다.
7개월 간의 재판은 아르테미시아에게는 더욱 끔찍한 것이었다.
재판의 중심은 아르테미니시아의 처녀성이 되었다. 그녀는 강간당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사람이 보는 앞에서
산파의 (처녀막) 검사를 받아야 했다. 오래 전에 당한 것인지 최근에 당한 것인지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또한 증언의 진실성을 입증하기 위해 손가락을 주리트는 고문을 받았다. 거짓말이면 아플 때 다른 말을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결국 타시는 유죄 판결을 받게 되었지만 실제 옥살이는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아르테미시아는 화가로서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화가 이전에 여성으로서 세상의 제도가
지닌
모순과 폭력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그에 대한 분노를 품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위 그림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에는 그런 느낌이 강하게 풍겨나온다.
그림 속 유디트는 화가 자신의 얼굴과, 적장의 얼굴은 그녀를 성폭행한 타시와 닮았다는 추측도 있다.

미술사적으로도 이 그림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겪는 여성의 고통을 매우 자극적이고도 저항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평가되곤 한다. 원래 '애국 현양'의 주제인 이 이야기를 아르테미시아는 '성의 투쟁'으로 전환시켰다.
유디트를 모든 여성의 잠재된 분노, 그 상징으로 그린 것이다.  
          - 이주현의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 중에서 -


아르테미시아의 다른 그림으로 「수산나와 늙은 장로들」이 있다.
수산나도 유디트처럼 구약성서에 나오는 여인이다. 두 명의 원로는 음욕을 품고 목욕하는 수산나를 협박하다가
실패하자 오히려 그녀가 외간남자와  나무 아래서 부정한 짓을 했다고 모함을 하여 사형을 선고 받게 만든다.
그림에는 음흉하고 위선적인 남자들의 폭력에 강한 거부의 손짓을 보내는 수산나의 고통스런 모습이 그려져 있다.
결국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예언자 다니엘의 지혜로 수산나는 누명을 벗고 원로는 처벌을 받는다.

하지만 아르테미시아에게 잔인한 폭력을 가한 성경 밖 현실은 그 이후 어떤 필벌과 정화의 과정을 밟아 왔을까?
'미투'로 드러난 사회 곳곳의 민낯에 다시 '무슨넷'이니 '박사방'이니 하는 변이와 변종의 충격이 더해졌다.
위치도 알 수 없는 그 방에 직접 들어가보지는 않았더라도 나도 은연 중에 그런 비슷한 현장의 언저리를
'늙은 장로들' 편에서 서성거리며 무심히 낄낄거린 적은 없었을까 두려운 마음으로 돌아보게 된다. 
섬뜩한 것은 아르테미시아의 그림이 아니라 아르테미시아가 감내하는 현실이다.

이제
어떤 '다니엘의 지혜'로 인간이 만든 이 (성적) 착취와 차별 그리고 폭력의 '바이러스'를 처리할 것인지
역겨움을 참고 현실을 주시해보지 않을 수 없다.
시몬 베유가 말하지 않았던가.
"순수함은 더러움을 응시하는 힘"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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