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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장류진의 소설집,『일의 기쁨과 슬픔』

by 장돌뱅이. 2020. 4. 30.


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엔 8편의 단편소설이 들어있다.

딸아이가 제일 먼저 읽고 추천하여 아내 그리고 내가 순차적으로 읽었다.

딸아이는 작가와 같은 연배이고, (소설 내용으로 보건 데) 사회 경험도 아마 같은 분야에서  한 것 같다. 
때문에 딸아이는 당연히 소설 속 이야기와 배경에 나보다 더 친숙했을 것이다.
물론
내게도 소설은 군더더기 없이 상큼했다. 이야기가 속도감 있게 진행되어 몰입하여 읽을 수 있었다.  
다만
내가 미처 경험해보지 못거나 익숙하지 않은 사소한 몇 가지에서는 어쩔 수 없이 '연식'의 차이를 느끼게 했다. 

1. 청첩장
결혼준비의 막바지 단계로 (중략) 정신없는 사개월을 보낸 끝에 가장 정신없는 청첩장 배포 단계에 와 있었다. 
매일 점심 저녁으로 사람들을 만나 인사하고 밥을 사야 했다.   
-『일의 기쁨과 슬픔』 10쪽 -

청첩장 배포가 결혼 준비 중 '가장 정신없는 단계'라니!
그게 뭐가? 그냥 나눠주면 되는 것 아닐까?
사실
딸아이가 결혼 준비의 같은 시기를 보낼 때 같은 이유로 나도 짜증을 부렸던 기억이 있다. 
청첩장 때문에 매일 늦게, 그것도 파김치로 들어오는 딸아이를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신혼집으로 옮길 딸아이의 짐을 정리하면서 꾹꾹 차올랐던 이유를 댈 수 없는 '억울함'과 '심술'을
짜증의 이유로 들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우리 세대와는 다른 젊은 세대의 풍속을 몰랐던 탓이다.

요즈음 세대엔 그냥 청첩장을 주는 것과 밥을 사며 주는 것과 차이가 있는 것 같았다.
그냥 주는 청첩장은 결혼식을 알리고 참석 불참석의 결정권이 수신인에게 있다면,
밥을 사면서 주는 청첩장은 참석이 의무임을 알리고 또 동의하는 합의서의 의미가 있고 한다.
대인관계에서 '마당발'인 딸아이에게 청첩장을 주는 일은 소설의 주인공처럼 '가장 정신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라떼 IS HORSE(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되는 '획득형질'인 꼰대의 어투가 나올수 밖에 없다.
'라떼'(나 때)는 청첩장은 그냥 결혼식을 알리는 것이지 받는 대상을 두고 어떤 기준에 따른 분류를, 
것도 전달 방식을, 달리해 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요즘 젊은 사람들의 청첩장 풍속이 그리 탐탁해 보이지는 않지만 
이제 내게 청첩장은 시효만료된 행사이니 그저 지켜볼 뿐인 일이겠다.



2. 단어와 문장
생소한 단어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백오피스, 마켓팅팀 트랜스퍼 지원자, 일러스트, 스크럼, 스크럼 마스터, 애자일 방법론, 스타트업, 이스터에그,
트렐로, 빌드버젼, 레고 스타워즈 시리즈 디스베이더 트랜스포메이션, 맥북의 '쵸팽' 폴더, 레이블 등등.〉
  
- 그 의미를 다 모르지는 않고 일부는 알고, 도 일부는 대충 문맥에서 유추할 수 있었지만 
몇몇은 내게 새로운 단어라 그 의미를 인터넷에서 확인해야 했다. 

추가합격은 우리 세대에도 있었지만 그걸 〈추합〉이라고 표현하지는 않았다.

평일 오프를 세번이나 날'렸다〉는 글귀도 나의 직장 생활에서는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다.
-재택근무를 하면서 접속을 세 번 끊었다고 이해했다. 


우리는 단어 하나만으로 웃을 수 있는 맥락과 그로부터 비롯된 웃음코드를 공유하고 있었다.〉'
- 독해에는 문제가 없지만 뭔가 좀 우리 세대 표현 방식과는 다르게 느껴진다.

 '단어와 문장' 몇 개를 예로 든 의도는 한글 사용이라는 당위를 들어 시비를 걸자는 데 있지 않다.
그냥 세상이 '라떼'와는 다르고 말의 변화는 새로운 세상으로 이행되었음을 의미한다는 
뻔하고
당연한 사실을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도 확인했다는 것일 뿐이다.


3. 산뜻하고 담백한 개인
내가 청년기를 보낸 7080은 '이념과잉'의 시대였다.
세상의 불합리를 정연한 논리로 줄을 세우며 '하나의 상황에 있는 하나의 결정'을 이야기 했다.
 '국독자'니 '신독자'니 주요모순이니 기본모순이니 하는 어려운 단어들이 술자리에서도 흔했다.
그런 자리에선 소설을 두고도 '계급적 당파성', '전형'이나 '전망'이란 단어를 자주 입혔다. 
'밥 먹고 똥을 싸는' 개별적 일상은 축소되고 집단적 거대 담론의 위세가 강렬했다. 
내게 고조된 당위적 목청들은 가끔씩 생경하거나 수학공식처럼 상투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일의 기쁨과 슬픔』에는 집단에 매몰되지 않는 개인들의 개성이 명확히 존재한다. 
"전체 스타트업 중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비율은 3%밖에 안된다"고 소설은 말한다. 
그런 경쟁과 차별의 무거운 세상을 건너는 인물들의 갈등과 고민이 부담스럽지 않고 발랄해 보인다.
거구의 씨름 선수가 아니라 나비같이 가벼운 스텝으로 벌 같은 펀치를 날리던 어느 권투선수를 연상시킨다.

하나의 '결정'이 아니라 여러 '선택' 중의 하나이기에 누군가 '전형'을 이야기 하면 진부해질 것 같다.
거대한 담론은 여전히 중요한 하나의 '선택'이고 덕목이겠지만. 

말미에 있는 인아영의 해설은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여기에는 한국문학이 오랫동안 수호해왔던 내면의 진정성과 비대한 자아가 없다. 깊은 우울과 서정이 있었던 자리에는 
대신 정확하고 객관적인 자기인식, 신속하고 경쾌한 실천, 삶의 작은 행복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마음이 있다. 
감정에 침잠해 있기보다는 가볍고 기민하게 움직이는 이 개인들은 특별하게 빼어나지도 눈에 뜨게 뒤처지지도 않는다. 
이들은 대단한 환상을 품게 하는 커리어 우먼이나 거대한 구조와 싸우는 정의로운 투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극단적인 고통에 시달리는 인물도 아니다. 다만 노동과 일사이의 경계를 명민하게 알고, 일의 기쁨과 
슬픔을 조화롭게 이해하는 , 이 시대 가장 보통의 우리들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정확한 이해, 생존과 생활에 대한 
탁월한 감각, 삶의 질과 행복을 지키는 센스를 겸비한 장류진 소설의 산뜻하고 담백한 개인이야말로 오늘날 한국문학의 
새로운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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