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여름이야?"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던 손자친구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물었다.
"여름? 여름은 유월부터라고 해야겠지?. 그치만 갑자기 내일부터 확 더워진다는 뜻은 아니야."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을 두부 자르듯 나눌 수 없으니, 5월 31일까지가 봄이고 6월 1일부터 여름이라는 건 너무 기계적인 설명이었지만 달리 어린 친구를 이해시킬 수 없었다.
말을 하고나니 하루 뒤로 다가온 여름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 것 같은 예감이('기대'겠지만) 들기도 했다. 오직 한 가지 '코로나'로만 기억될 2020년의 봄은 지루했고 잔인했다. 수많은 생명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그놈 때문에 스러졌고 남은 우리는 '만지지도 만나지도 않으며' 살고 있다.
신난간난, 모내기 끝낸 마을에
밤꽃 향기 자욱합니다.
엉덩이 여문 처녀애라곤 없는데
수컷내 같은 그 향기 온 마을을 덮다니.
괜스레 개구리떼 소리만
마을의 밤을 장악해버립니다.
세상은 항시 옥신각신,
욱신거리는 관절처럼 고단하고
머루빛 잘 저민 하늘은
그래도 지상의 땀방울을 죄 거두어
서걱서걱 별밭을 일구어대니
시방 모든 것이 잊혀진들 대수겠습니까.
청명한 바람도 물결쳐와
지친 숨결을 왜 쓸어주지 않겠습니까.
앞집의 영농후계자 석만이는
햇볕에 잘 익은 마누라 태우고
씽씽 오토바이 몰아 읍내로 달려
모처럼 갈비 한 대도 뜯고
시원한 맥주도 몇 잔 나누고
종당엔 노래방에 들러
사랑도 울분도 맘껏 불러재낀 뒤 돌아와
아 글쎄 밤으로 밤으로는
밤꽃 향기 진동하고!
개구리 앓는 소리 만발하고!
끝내 눈앞 가득 별톨 쏟아지는! 사랑을
흔전만전 나누었더랍니다.
노동 뒤에 사랑 없으면
어디서 뻐꾹새 한 마리인들 울겠습니까?
누구 돌팔매질할 애 하나 없어도
앞집의 살구나무 살구 뚝뚝 지는 소리
이밤사 개구리 울음 사이로 아득합니다.
우리가 이 땅의 마지막 어둠이 되어
꽃들이 피고 지는 소리
별들이 떨리고 떨리는 소리
또 선 하나 잘못 거드리면, 와르르
심금 온통 울려날 그리움만 살찌울지라도
시방도 앞녁 뒷녁 들판에선
어린 모 한창 뿌리 내리는 몸부림,
뿌리 내린 어린 모
밤의 이슬 먹고 별빛 먹고
밤으로 밤으로 한 자씩이나 자라는 몸부림,
일망무제 교교합니다.
누가 감히 서럽지 않겠습니까.
누가 감히 성성치 않겠습니까.
-고재종, 「밤꽃 피는 유월에」-
어린 손자가 마스크를 벗고 마음껏 놀이터를 질주하는 시간으로.
마스크를 반복해서 여며주는 일 없이 친구가 좋아하는 이층버스 맨 앞 좌석에 앉아 먼 곳을 다녀오는 시간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어디론가 씽씽 달려가 갈비도 뜯고 시원한 맥주도 들이키고 노래방에 들러 옛 노래도 맘껏 불러재끼고 흔전만전 사랑도 나눌 수 있는 시간으로.
밤꽃 피는 유월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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