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 잠에 빠져 누워
게으름에 문 밖을 나가지 않네.
상 위에 던져진 책 더미
이리저리 뒤섞여 짝이 맞지 않네.
화로에는 향 연기 일고
돌솥엔 차 끓는 소리.
몰랐구나, 해당화 꽃잎이
온 산 내린 비에 다 진 줄도
(竟日臥耽睡, 懶慢不出戶.
圖書抛在床, 卷帙亂旁午.
瓦爐起香煙, 石鼎鳴茶乳.
不知海棠花, 落盡千山雨.)
-김시습의 「탐수 眈睡」-
자발적 아닌 코로나에 밀린 한가로움이지만 어쨌거나 한가로운 요즈음이다.
무엇보다 활동반경이 단순해졌다.
아내와 산책을 하고 책을 읽고 테레비젼으로 영화를 보고 끼니를 만드는 일을 반복한다.
일주일에 한번은 손자친구를 보러가는 게 유일한 외출이다.
친구들과 술을 나눈 지도 오래되었다. 카톡으로나 안부를 주고 받을 뿐이다.
덕분에 오래 전부터 미뤄두었던 옛시를 읽기 시작할 수 있었던 건 좋은 일이다.
한자가 걸림돌이지만 요즘 책이야 다 풀이가 되어 나오니 감상에 큰 문제가 되진 않는다.
가끔씩 원래 쓰였던 대로 읽고 싶어지면 사전을 뒤져 한자를 찾아보기도 한다.
하지만 눈에 익혀본달 뿐이지 오래 기억에 남을 리 없다.
방금 전에 본 글자도 금새 잊어버리고 다시 찾는 일이 잦다.
이 책 저 책 두서없이 꺼내다 보면 어느 사이에 상 위에 책이 뒤석여 있다.
가끔씩 비가 내리는 날이면 커피를 끓여 아내와 마시니 적어도 '무늬'는 매월당과 비슷해 보인다.
그도 일생을 떠돌며 보낸 백수 아니었던가.
한 가지, 김시습의 시에 가끔씩 나오는 '원숭이'는 생경하다.
-'원숭이'와 산새가 내 식구(猿鳥爲伴侶)
-푸른 낭떠러지엔 흰 '원숭이' 울부짖네 (蒼崖叫白猿)
-'원숭이' 울고 달 밝은 곳이 동쪽 숲이니(猿啼月白是東林)
-봄 산에 짝 없이 혼자 걷는데 (春山無伴獨行時)
'원숭이' 쌍쌍이 앞뒤 따르네 (猿犺雙雙先後隨)
옛날 원숭이가 우리나라에 살았을 리 없으니 그의 시 속 '울거나 앞뒤로 쌍쌍이 따르는' 원숭이는 허상이다.
그는 아마 중국에서 온 책에서 '원숭이'를 배우지 않았을까?
유홍준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이 '원숭이 정서'를 명쾌하게 정리했다.
"모든 것을 자기 정서에 내맡기지 못하는 불안감, 뭔가 남 모를 유식한 끼가 있어야 차원이 높아 보이고,
이국적인 냄새도 약간은 풍겨야 촌스러움을 벗어날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나는 자신감의 상실증인 것이다."
전국에 걸쳐 꽤 여러 곳에 있다는 이른바 '로데오거리'도 김시습의 원숭이와 닮아 있다.
아무 상관없는 먼 나라 지명을 따오고 거대한 조형물까지 세우는 심리를 나로서는 달리 이해하기 힘들다.
우리 사회 내부 문제로 찬반의 시위를 하는 것은 저마다의 자유이지만 뜬금없이 성조기를 흔드는 모습도 비슷해 보인다.
소통보다는 '구별짓기'를 하려는, 그것이 지닌 허상의 권위에 묻어가려는 욕망.
이제 로데오거리라는 이름에서 어떤 특별한 감성을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구별짓기'가 평준화 된 것이다.
세상은 또 다른 '구별'을 찾아 진화해 가겠지만 그에 대한 무의미한 추종은 어느 날 문득 우리를 지치게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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