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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by 장돌뱅이. 2020. 6. 11.


*사진 출처 : 한겨레신문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은 고 박완서의 소설 제목이다. 
김현승의 시 「눈물」에서 따온 것으로 의미는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한다.

소설 줄거리를 소설 속 표현대로 요약하면 이렇다.

젊은이들이 제 몸에다 불을 붙여 횃불을 삼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깜깜한 80년대. 
공부밖에 모르던 아들이 시위에 나섰다가  '그놈의 쇠파이프'에 목숨을 잃었다.
아들은 백만학도의 애도 속에 열사가 되었다. 생때같은 아들이 하루아침에 간 데 없어진 
끔찍한 아픔 속에서 어머니는 될 수 있는 대로 남들 한테는 예전처럼 굴려고 애를 쓴다. 
아무렇지 않지 않은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보이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한 것이다. 

외부적으로는 민가협 같은 집단적인 활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마음 속으론 세상을 달라지게 한 힘 중엔 아들의 몫도 있다는 자부심도 가지면서. 
아무도 없는 공간에선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혼잣말로 대화도 나누면서. 
그리고 너무 견딜 수 없을 때는 은하계 주문도 외우면서.
은하계주문이란 백만 광년이니 십억 광년이니 하는 거대한 우주의 크기를 되뇌이는 반복적 행위를 통해
우리가 사는 지구를 바닷가의 모래알만도 못하게 극소화 시키고, 그 모래알에 붙어사는 인간의 운명이나 
수명 따위도 덩달아서 아무 것도 아니게 만드는 효과를 얻고자 함을 말한다. 
잠시 동안이라도 태산 같은 설움이 안개의 입자처럼 미소하고 하염없어지는 위로를 받으려······

그러다가 교통사고로 뇌와 척추를 다쳐 하반신 마비에 치매까지 걸린 아들과 살고 있는 동창의 집을 방문하게 된다.
오랜 병구완을 하느라 동창은 가산 탕진은 물론 파파 할머니가 되어있었다.
살이 찌고 기골아 장대하지만 상식적인 희노애락하고는 동떨어진 정신상태의 아들에게 동창은 아이구 웬수, 
저 놈의 대천지 웬수, 니가 내 앞에서 뒈져야지 내가 널 두고 뒈져봐라, 나도 눈 못 감겠지만 니 신세가 뭐가 되니 하며
말끝마다 욕설을 퍼붓는다. 지옥 같은 풍경이었다. 

그러면서도 아들에게 과일을 먹이고 욕창이 생길까 요 위에 누운 아들의 몸을 이리저리 굴리고 바닥에 닿았던 부분에 마사지를 
해주었다. 어머니가 동창을 도와주기 위해 아들의 몸에 손을 대자 아들은 성난 짐승처럼 소리를 지르고 눈을 뒤집었다. 
동창
이외에는 아무도 손을 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 악담밖에 안 남은 것 같은 동창이 씩씩하고도 자애롭게 말했다.
아이, 이 웬수덩어리가 또 효도하네.

저는 별안간 그 친구가 부러워서 어쩔 줄을 몰랐어요. 남의 아들이 아무리 잘나고 출세했어도 부러워한 적이 없는 제가 말예요. 
인물이나 출세나 건강이나 그런 것 말고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생명의 실체가 그렇게 부럽더라구요. 
세상에 어쩌면 그렇게 견딜 수 없는 질투가 다 있을까요? 날카로운 삼지창 같은 게  가슴 한 가운데를 깊이 훓어내리는 것 같았어요.
너무 아프고 쓰라려 울음이 복받치더군요. 여기서 울면 안 돼. 나는 황급히 은하계 주문을 외려고 했죠. 소용없었어요. 은하계 그까짓 
거 아무 것도 아니더라구요. 저는 드디어 울음이 복받치는 대로 저를 내맡겼죠. 제가 그렇게 많은 눈물을 감추고 있었는 줄은 저도 
미처
몰랐어요. 대성통곡, 방성대곡보다 더 큰 울음이었으니까요. 제 막혔던 울음이 터지자 그까짓 은하계쯤 검부락지처럼 떠내려가더라구요. 은하계가 무한대건 검부락지건 다 인간의 인식 안에서의 일이지, 제까짓 게 인간 없이는 있으나 마나 한 거 아니겠어요. 

6·10 민주항쟁 33주년 기념식 뉴스를 보고난 후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을 다시 읽었다.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곳으로 자식을 보낸
겨레붙이의 개별적일 수밖에 없을 깊은 아픔을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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