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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두 징의 손 편지

by 장돌뱅이. 2020. 5. 25.


*손자친구가 처음으로 쓴 아내와 나의 부름말.


*딸아이가 유치원 때 쓴 편지.

딸아이에게서 손자친구까지.
2대가 비슷한 나이에 쓴 서툰 손글이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진 시간을 생각하게 한다.
'그만큼만의 간격으로 우리 사이에 길이 있다'고 믿는다.
삶은 여전하지만 '누구의 가담 없이도 우리 중심이 어느 틈에 변경'되었을 뿐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법이니
아내와 나는 이제 '오래 예측하면서' 살지 않으려 한다.


늦봄의 저녁 한때를 나는 남방 소매 걷어올리고 
허리에 고무줄을 댄 짧은 반바지 입은 채 
담배를 붙여 물기 위해 현관 계단에 앉아 있다 
언덕길로 아이들 앞세운 젊은 부부가 손을 맞잡고 
천천히 걸어 올라간다 
저들의 산책은 지금 집 주위를 맴돌지만 머지않아 
아이들이 버리는 이 배회의 한가함을 
나처럼 혼자 지키는 때가 올 것이다 
누구의 가담 없이도 우리 중심은 
어느 틈에 변경된다, 시간을 건너지 않고서 무엇으로 
우리가 늙는다 하겠느냐 
아이들 재잘거림이 어스름 속으로 나직이 깔려가는 
언덕 저켠에서 낮에 본 아카시아가 
꽃 향기를 전해온다 
나는 조금 전 내 방 서가 틈새에 놓인 
해안 단애를 배경으로 여럿이서 찍은 사진을 
보고 왔다, 어깨너머로 출렁거리는 수평선 
저쪽으로 몇 년 전의 시선들이 꺾여 있다면 네가 바라보는 
일몰 또한 이곳까지 닿지 못할 것이다 
오월의 이쪽은 한 저녁이 비를 준비하고 있다 
아니다, 비 오기 전에는 비가 오기까지 
측되는 짧은 순간이 있다, 나는 오래 예측되면서 
사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그것조차 욕망의 흔적이라면 
나는 흘러가버리는 시간의 앞뒤 순서를 늦게라도 
뒤바꾼다, 비 오기 전에도 달은 
구름 사이에 있거나 구름 속에 있었다 
내가 본 것은 금방 지워질 내 알리바이일 뿐, 비가 와도 
달은 중천을 건넌다, 나는 이제 증명하지 않는다 
살아내기에도 우리 인생 너무 벅찬 것이다 
흘러가는 틈새에서 네가 바라보는 꽃, 
언젠가는 기억이 전혀 닿지 않는 곳에서도 향기를 뿌리고 
씨를 앉힐 것이다 
그러므로, 피는 것과 지는 것의 거리가 한없이 넓어질 때 
그만큼만의 간격으로 사람 사이에 길이 있다 하자 
나는 이제 어두워서 누가 그 길 오고 가는지 
저문 뒤에도 우리 길 여전할지 
내리기 시작하는 비에 겹쳐 모든 생각 지우면서 
후미진 골목 끝을 오래 바라보고 있다

-김명인의 「비 오기 전에 - 仁煥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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