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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그의 마지막 선택

by 장돌뱅이. 2020. 7. 11.


예수가 말했듯 사람들은 모두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고 산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자기가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을 만큼만 
예수의 십자가를 받아들인다. 유대교 신학자들은 예수를 '가장 유대인다운 유대인' '위대한 유대인 형제'로 본다. 계몽주의적인 
휴머니스트들은 예수를 '인간을 선하게 이끌려 했던 위대한 한 인간'으로 받아들인다. 실존주의자들은 '자신의 운명을 직시하고 
그 운명을 피하지 않음으로써 마침내 운명과 자기 자신을 능가하였다'고 생각한다. 카뮈는 '예수가 마지막 순간에 죽음에 대한 
불안 때문에 절규한 까닭에 나는 그를 나의 친구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의 가르침을 '세상에 대한 구원과
 철저한 변혁을 위한 갈망'으로 해석한다. 오늘날의 젋은 세대에게 예수는 '집도, 가구도, 손가방도, 신분증이나 예금통장, 
보험증서도 가져본 적이 없는 욕심 없는 순회설교자'이며 '모든 인습을 거부한 고상한 무정부주의자'이기도 하다.
'현존하는 모든
것에 발작을 일으킨 광대이자 바보, 지하운동과 팝의 옹호자'로 예수를 이해하는 젊은이들도 있다.
-박원순의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중에서 -

예수의 죽음에 관여한 수석 사제와 대사제 카야파, 율법학자, 바리사이, 빌라도, 그리고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라고 외쳤던 군중들도
'자기가 이해하고 볼 수 있을 만큼만'의 예수를 말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삶이 그런 모든 타인들의 의견의 산술적 합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각각의 의견은 모두 1/N의 동등한 가치와 정당성을 지닌 것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박원순시장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자기가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을 만큼만'의 평가를 내릴 것이다.
나 역시도 그 중 하나일 뿐이다. 나는 시민운동과 정치에 투신한 그의 공생애를 지지해왔다.
그가 어떤 '스스로 견딜 수 없는 불명예'나 문제로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진 것인지 아직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의 행동과 마지막 선택에 지지를 보낼 수 없음은 물론이다.

다만 우선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명복을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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