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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비오는 날 옥수수 쪄먹기

by 장돌뱅이. 2020. 7. 25.

비가 내리는 여름날이었다.
빗속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들과 함께 논 사이 도랑을 오르내리며 물고기를 잡았다.
허름한 반두임에도 고기는 곧잘 들었다. 고기를 잡아서 뭘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찌그러진 주전자에 미꾸라지와 작은 붕어, 피라미 등을 집어넣고 가끔씩 노는 모습을 확인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기를 몇 시간, 놀이가 시들해지면서 애써 잡은 물고기를 다 놓아주었다. 그제서야 비에 젖은 몸이 추워왔다. 집에 들어서자 어머니는 새파래진 입술에 감기 걱정을 하며 서둘러 미리 준비한 따뜻한 물로 목욕을 시켜 주었다. 새 옷으로 갈아입고 엎드려 만화책을 보는 중에 어디선가 달달한 냄새가 풍겨왔다. 옥수수를 찌고 있다고 어머니가 알려주었다. 찜통 속에서 가지런히 누워 익어가고 있을 노란 옥수수가 그려졌다. 빗줄기는 점차 가늘어져 갔다.

노란 옥수수의 냄새, 마당에서 건너오는 차분한 빗소리······ 햇솜 같은 아늑함에 녹아들다가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내가 어느 순간 놀라 일어났을 땐 벌써 어두운 저녁이 되어 있었다.
“옥수수는······?”
잠에서 깨자마자 나는 왠지 억울한 생각이 들어 투정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니 옥수수 잘 놔뒀으니까 밥부터 먹어라."
부채로 물것을 쫓아주던 어머니는 그런 나를 보고 웃었다.
식구들은 벌써 저녁 밥상을 물린 듯했다.
“싫어. 옥수수부터 먹을래.”
나는 별 이유도 없이 심통을 부리며 옥수수를 고집했다.

어머니는 밥과 옥수수를 함께 차려주었지만 나는 기어코 먼저 옥수수를 집어 들었다.
내가 상상했던 노란 알이 촘촘히 들어찬 옥수수였다.
비는 벌써 그친 듯 토방 아래 낙숫물 자리엔 일정한 간격으로 땅이 패어 있었다.

지금도 옥수수를 보면 문득문득 생각나는 어린 시절의 어느 날이다. 따뜻한 목욕물과 목욕 뒤의 가벼움, 갈아입은 옷의 뽀송뽀송함, 마당에 가득한 빗소리, 옥수수가 익어가는 달콤한 냄새, 흥미진진하던 만화책, 잠에서 깨어났을 때 가만가만 부채를 부쳐주고 계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어제인 듯 생생하다. 그 기억들로 옥수수는 비로소 나만의 맛을 갖게 되었다. 음식의 맛이란 재료와 양념의 조합이나 미각과 시각, 후각을 넘어 함께 사람과 나눈 이야기가 더해지면서 완성되는 것 아닐까?

택배로 주문한 옥수수를 손질하면서 아내와 옛이야기를 하다가, 쪄먹으려면 속껍질 한 겹은 남겨두는 게 좋다는 팁을 까먹고 그만 홀랑 다 벗겨내고 말았다. 그래도 뭐 옥수수 맛이 어디가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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