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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타고나는 법이지만

by 장돌뱅이. 2020. 11. 11.


영화 『세라핀』은 같은 이름의 실존 화가를 다룬 영화다.

세라핀 루이
(Séraphine Louis, 1864-1942)는 프랑스 북부 시골 마을인 상리스 Senlis에서 세탁, 청소, 푸주간 일 등
온갖 허드레일을 하면서 홀로 그림을 그렸다. 받은 품삯으로는 방세도 물감 값도 부족했다.
그녀는 들판의 꽃과 풀,
수초와 진흙 등으로 물감 대용품을 만들어 썼다. 붓도 없어 손가락으로 그리기도 했다.

미술교육은 물론 아무 교육도 받지 못한 그녀에게 그림은, 그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신의 계시'였고 본능 같은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영향을 받을 수 없는 환경이었고 무엇을 위한 그림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화폭은 오로지 그녀 자신만의 감각으로 채워졌다. 독특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보면 우리나라 민화 같기도 하고, 성당의 스테인드 그라스 같기도 한 그녀의 그림은 환상적이면서도 기괴한 강렬함을 내뿜는다.

그림을 알아본 건 그녀가 가정부로 일하던 집의 주인이었다.
미술평론가이자 화상인었던 그로 인해 세라핀의 그림은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 세라핀 루이의 그림 「꽃과 과일」 1920


"복서의 재능도 화가의 재능과 다르지 않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거나 아예 없거나."
칠팔십 년 대를 풍미한 권투 선수 로베르토 듀란을 그린 영화 『Hands of Stone(돌주먹)』에서
트레이너인 레이 아르셀(로베르토 드 니로)이 한 말이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거나 아예 없거나!'
사실이다. 세라핀 루이가 그랬고, 권투 선수 로베르토 듀란이 그랬다.
세상에 수많은 축구선수가 있지만 누구나 리오넬 메시처럼 할 수 없는 건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닐 것이다.

경험적으로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땀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은 신뢰하기 힘들다.
그 말은 초등학교 시절 교장 선생님의 지루한 훈시이거나
'노력만 하면' 당신 아들이 천재라고 믿으셨던 어머님이
공부 좀 하라고 나를 채근할 때나 쓰시던 말이다.
그보다는 천재는 99%의 타고남과 1%의 노력이 더 설득력 있는 말이 아닐까?
노력까지도 타고나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충남 부여 무량사에 있는 김시습 초상과 시비

다섯살에 대학과 중용을 통달한 '신동 김오세(神童 金五歲)' 김시습은 소문을 듣고 노학자가 찾아와

"나는 이미 늙어 쓸모가 없는 몸이니 노자를 넣어 칠언절구를 지어보아라"고 하자
"늙은 나무도 꽃을 피우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老木開花心不老)"라고 답을 했다고 한다.  
겨우 다섯 살에......
모자르트도 다섯 살에 작곡을 했고, 타이거우즈도 비슷한 나이에 골프 신동으로 불렸다고 한다.

학창 시절만 돌이켜봐도 알 수 있다.
분명 같이 놀았는데도 시험 성적은 혼자서만 좋은 '재수 없는 놈'들이 꼭 있지 않던가.
실제로 내 친구 중 한 녀석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가 끙끙거렸던 "수학II의 정석"을
'고등학교 1학년 여름 방학 때 그냥 다 풀어버렸어'라고 심상히 말해서 '왕재수'의 끝판을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개인이 지닌 어떤 재능이 전적으로 개인의 것인가 하는 문제는 있다.
재능이 발현되고 인지되고 성장하기까지 필요한 사회·경제적 배경이 있을 것이므로.)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운명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타고난 바탕과 존재의 다양성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세상엔 타고난 99%를  '그렇게 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삶에 전력으로 투사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천재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행복이 보장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떤 (많은?) 사람들은 1%를 99%로 확장시킨 듯한 삶을 산다.
사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그런 구분 없이 그냥 살아낸다.
그런다고 불행한 것은 아니다. 무의미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더 지고지순일 수 있다.
누구도 타인의 삶과 행복을 속단하여 저울질 할 수 없다.  
삶은 그래서 어렵고 또 신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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