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친구는 단어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 뜻을 모르는 말이 대화 중에 나오면 꼭 되묻고 지나간다.
며칠 전에는 '생뚱맞다'가 뭐냐고 물어서 아내와 나를 당황시켰다.
어린 친구에게 사전의 설명은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없을 것이기에 상황으로 설명해주어야 한다.
"네가 유치원에 가는 도중에 갑자기 '지금 키즈카페 가는 거야?'라고 물으면 그게 생뚱맞은 거야" 라고 아내가 대답해주었다.
손자친구는 그 설명이 재미있었는지 비슷한 상황을 여러가지 만들어 내며 깔깔거렸다.
"내가 유치원에 가서 '어? 왜 마트가 아니지?' 이러면 생뚱맞은 거야."
"아빠가 퇴근했는데 내가 '안녕히 다녀오세요' 이러면 생뚱맞은 거야."
특별한 단어나 말법을 접할 때 그 의미와 활용을 잠시 생각해보곤 한다.
반드시 손자 친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단어에 숨은 뜻과 사용을 머릿속에서 '공굴리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1. 칠칠하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는 "칠칠하다"의 뜻을
1). 나무, 풀, 머리털 따위가 잘 자라서 알차고 길다.
2). (주로 ‘못하다’, ‘않다’와 함께 쓰여) 주접이 들지 아니하고 깨끗하고 단정하다.
3). (주로 ‘못하다’, ‘않다’와 함께 쓰여) 성질이나 일 처리가 반듯하고 야무지다, 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예문으로,
- 검고 칠칠한 머리/ 숲은 세월이 흐를수록 칠칠하고 무성해졌다.
- 아직도 칠칠치 못한 속옷 차림인 채 방 안의 아랫목과 윗목 사이를 연락부절로 서성거리면서…. ≪윤흥길, 완장≫
- 칠칠하지 못한 사람/ 그만큼 칠칠하고 일새 빠른 사람을 구경이나 할 줄 아오? ≪심훈, 영원의 미소≫ 등을 들었다.
그러므로 자기 몸 간수를 잘 못하는 사람이나 주접스러운 사람을 보고 '칠칠맞게스리'하고
혀를 차는 것은 적절치 않다. '칠칠치 못하게스리'라고 해야 한다.
사전 속 의미는 좋지만 "칠칠하다"는 발음을 해보면 느낌 상 좀 '칠칠맞아(?)' 보이는 건 사실이다.
"당신은 정말 칠칠한 사람이야"라고 덕담을 건넸다간 폄하의 의미로 오해받기 십상일 것도 같다.
*호생관 최북의 「공산무인도」
영·정조 시대에 이름난 화가로 최북(崔北, 1712-1760(?))이 있다.
그의 호는 호생관(毫生館)으로 '붓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란 뜻이다.
최북은 출신 계급이 미천하고 가난하여 실제로 그림이 아니면 먹고 살 방도가 없었다.
그림 재주가 출중하니 도화서 화원이라도 되었으면 좋았으련만
오만한 성품과 불같은 기질의 소유자인 그는 어디에도 구속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숱한 기행과 위악을 반복하며 용돈이 궁하면 "평양과 동래에까지 가서 그림을 팔았다"고 한다.
아침에 한 폭 팔아 아침밥을 얻고 (朝賣一幅得朝飯)
저녁에 한 폭 팔아 저녁밥을 얻고 (暮賣一幅得暮飯)
갑자기 최북을 말하는 것은 그림 때문이 아니라 그의 자(字)가 '칠칠'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 북녘 북(北)자를 둘로 쪼개 스스로 칠칠(七七)이라 한 것이다. 사람들도 그를 '최칠칠'로 불렀다.
불합리한 신분 제도로 겪어야 했던 고통과 울분을 냉소적 자기비하로 표출하며 반항한 것이다.
"그렇다! 나는 붓으로 그림이나 그려 먹고사는 칠칠이다. 그러니 어쩔테냐!" 하는 투로(유홍준의 글)
물론 그의 이름 '최칠칠'과 '칠칠하다'는 발음 이외에는 연관성이 없다.
'칠칠하다'란 단어를 생각하면 '최칠칠'의 삶과 그의 이름이 주는 '칠칠하지' 못했던 느낌이 떠올라 적어본 것이다.
2.주책없다
주책은 '일정한 자기 주견이나 줏대'를 뜻하는 한자어 주착(主着)에서 나왔다고 한다.
주착은 주책이 되었고 '주책없다'는 '일정한 줏대가 없이 이랬다저랬다 하여 몹시 실없다'는 뜻이다.
흔히 어떤 상황에 적당하지 않은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을 향해 '정말 주책이야'라거나 '주책스럽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주책바가지'는 줏대가 매우 많다는 뜻이 아니라 반대로 '주책없는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이다.
위 사진은 이주 노동자와 한국어를 공부하는 교재를 찍은 것이다. 보통 '의'를 빼고 '이거 스티븐 씨 책이에요?' 라고
말하므로 어렵고 쉽고를 떠나 굳이 초급반 교재에 실을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3. '∼의'에 대하여
'∼의'는 "체언에 붙어 그 체언이 다른 일이나 물건의 임자가 되게 하며, 그 일이나 물건의 뜻을 꾸미는 관형격조사"이다.
하지만 우리 말에서는 '의'를 잘 안 쓴다. 옛글에도 '의'는 좀처럼 잘 안 나온다.
입말(구어체)에서는 지금도 '의'는 잘 안 쓴다. 생략해도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일본말과 비교하면 이 특성은 두드러진다.
우리 말은 "우리(의) 집"이라고 할 때 '의'를 생략해도 되지만 일본말에서는 “私の家”에서 'の'를 생략할 수 없다.
다음은 일본의 한 소학교 아이가 쓴 글이다.
"きのう私は私の家のうらの私の家の畑の私の家の桃をとってたペました.
관형격조사 ‘の’가 8개나 나오지만, 그 어느 한 자도 없애서는 안된다고 일본의 어느 교육평론가는 말하고 있다.
이 글을 그대로 우리 말로 직역을 하면 이렇게 된다.
(어제 나는 나의 집의 뒤의 나의 집의 밭의 나의 집의 복숭아를 따먹었습니다.)
우리 말로 바꾸면 '의'가 없어도 된다.
"나는 어제 우리 집 뒤에 있는 우리 밭 복숭아를 따먹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온갖 복잡한 일들을 설명하거나 자세한 생각을 나타낼 때 완전히 입말 그대로 '의'를 거의 쓰지 않고
정확한 글을 쓰기란 어렵고, 또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고 본다. 다만 흔히 쓰는 쉬운 입말이나,
좀 논리를 세워서 쓰는 말이라도 입말체로 쉬게 써도 될 것을 공연히 남의 나라 말 번역한 글같이 함부로 '의'를
넣어 쓰는 버릇은 우리 말을 죽이는 글쓰기가 아니할 수 없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꽆 피는 산골' 우리가 무심코 부르면서 자라난 이 노래부터 우리 말법으로 된 말이 아니다.
'내가 살던 고향'이지 어째서 '나의 살던 고향' 인가?
지금 우리 말에서는 다른 어떤 바깥말의 오염보다도 토씨 '의'를 함부로 쓰는 문제가 가장 심각하다.
이렇게 된 데는 우리 나라 지식인들, 글쓰는 이들이 책임이 크다.
이들이 모두 외국말법으로 외국말 직역한 말투로 '유식하게' 쓰고 말하면서 우리 말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몇 가지 실제 경우를 보면 뜻이 더 명확해진다..
-혈육끼리 서로의 입장을 이해할 때가 -> 서로
-민정 압승했지만 정치권 모두의 패배 -> 모두
-그의 글의 최대의 장점 -> 최대
'의'가 함부로 쓰이는 문제에서 더 나가 '와의(과의)', '에의', '로의(으로의', '에서의', '로서의(으로서의)',
'로부터의(으로부터의)', '에로의(로의, 에의)'는 아예 일본말을 그대로 직역한 어투로 우리의 말법과는 맞지 않는다.
- 전통문화와의 만남 -> 전통문화와
- 아름다움에의 약속입니다 -> 아름다움을 약속합니다
- 앞으로의 귀추가 어떠하든간에 -> 앞으로
- 글에서의 감동이란 -> 글에서, 글의, 글에서 얻는
- 소설가로서의 권위 -> 소설가로서, 소설가의
-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이루기 위해 -> 억압에서
- 행복에로의 인도 -> 행복으로 (인도함) (안내함), 행복의 (길잡이)
((이상 이오덕 선생님의 『우리 글 바로쓰기』 엣 발췌)
언어는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이런 말들도 언젠가는 우리 말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날이 올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까진 아니다. 그리고 그 말이 바깥말이어서 무조건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바깥말의 군더더기를 없애고 났을 때 드러나는 우리 말이 간결하고 산뜻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쩌랴. 우선은 이 블로그에 올린 내 글부터가 엉망이다.
이오덕 선생님의 글에 비춰보기 이전에 자동맞춤법 검사기에만 넣어봐도 틀렸다는 지적이 수없이 달린다.
쉬운 일은 없다. 부단히 가다듬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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