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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늙음'에 관한 영화 세 편

by 장돌뱅이. 2020. 12. 6.

1.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디언


1962년 63세의 버트 먼로(안소니 홉킨스)는 미국 유타 주의 보너빌 스피드웨이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고향 뉴질랜드를 출발한다. 보너스빌은 고속 자동차 경주로 유명한 곳이다.
대회 참가를 위해 출발 오래 전부터 그는 자신의  1920년산 낡은 오토바이를 초고속 경주용으로 개조하여 왔다.
황혼의 나이와 건강 문제도 있어 만류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의 열정에 감동한 이웃의 도움과 대출을 받아 배편으로 미국으로 온 버크는 천신만고 끝에 대회에 참가하게 된다.
그리고 몇 차례의 도전 끝에 마침내 약 300km/h라는 1000cc 미만 바이크 최고속 기록을 세운다.
이 기록은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고 영화는 전한다. '인디언’은 버트가 탄 오토바이의 이름이다. 

"가야 할 때 가지 않으면 가려할 때는 갈 수가 없다."
버크가 떠나기 전에 가깝게 지내는 이웃 소년에게 한 말은 이 영화의 상징이 되었다.
사람들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증명한 노장의 투혼에 찬사를 보냈다.

내겐 어린 시절부터 무엇이 되거나 무엇을 이루겠다는 간절한 꿈이 있었던 것 같지 않다.
아주 잠깐 만화가나 소설가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있다.
하지만 꿈이라기엔 타고난 소질도 없고 무엇보다 별도의 노력을 진지하게 해본 적도 없어 그냥 상상 같은 것이었다.
그냥 학교 가야 할 때 학교 가고 직장 다녀야 할 때 직장 다니며 살았다.
'똑바로들 사슈!'하며 의기양양 사표를 던지는 일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현실 앞에 상상만 해봤을 뿐이다.
특별히 충실하진 않았지만 그때그때 상황에 적응하며 살아온 것 같다.
그래서인지 백수인 지금도 백수에 맞는(?) 생활을 하며 지낼 뿐 특별하게 미루어 온 꿈에 대한 갈증은 없다.

어떤 사람이 '젊어서는 열심히 일하고 60 넘으면 세상 훌훌 여행을 하며 살겠다'는 말을 했을 때,
나는 '젊어서는 하는 여행엔 젊은 감성이 있을 것이고 늙어서 하는 여행엔 늙은 감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여행처럼 밀린 방학숙제 하 듯 몰아서 한다고 지난 날의 미진함 대체할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엔 있는 것 같다.
못 이룬 꿈에 대해 연연하기보다는 지금의 현실에 맞는 소망을 새롭게 가꾸고 싶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살아온 날을 지우라 뜻이라는 말이 내겐 조금 더 넉넉해 보인다.

물론 어떤 경우에도 각고의 노력 끝에 해묵은 꿈을 이룬 사람은 칭송받아 마땅하지만.

2. 업(UP)


영화 업(UP)의 주인공 칼 프레드릭슨은 78세의 성격 까칠한 노인이다.
기력이 쇄한 몸은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도 쉽지 않다. 침실에서 거실로 내려오는데도 리프트를 타야 한다.
혼자 일어나 혼자 식사를 하고 청소를 한다. 적막하고 쓸슬한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정장 차림에 모자를 쓰고 집을 나서 보지만 갈 곳도 없다. 그저 집 앞 발코니에 앉아 있을 뿐이다.
집 주변은 온통 공사장이다. 공사를 하는 측에서는 집을 팔라고 설득해 보지만 칼은 고집불통이다.
집에는 아내 엘라와 지낸 추억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엘리는 칼의 소꿉친구다. 둘 다 모험을 좋아하여 만났다.
성인이 되어 둘은 결혼을 하고 집을 사고 가구를 들이고 집단장을 하고 언덕 위 나무 아래에서 소풍을 즐긴다.
동물원에서 칼은 풍선을 팔고 엘리는 새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퇴근하면 나란히 앉아 손을 잡고 책을 읽는다.
부족할 것 없는 생활에도 아쉬움이 생겨난다. 엘리가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의사의 판정을 받는다.
의기소침해진 엘리에게 칼은
유년 시절에 만든 추억의 책을 펼치며 새로운 목표를 제안한다. 
전설의 파라다이스 폭포를 찾아 모험을 떠나자는 것이다. 활기를 되찾은 둘은 여행 경비를 위한 저금통을 만든다.
그러나 돈은 모일만 하면 늘 늘 쓸 곳이 생긴다
. 자동차를 고쳐야 하고 병원에 가야하고 폭풍우에 망가진 집수리를 해야 한다.
어느 날  파라다이스 폭포를 가기 위한 비행기 표를 마련하지만 소풍을 가던 언덕조차 오르기 힘들어 하던 엘리는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병실에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칼과 엘리의 위 동영상을 보며 콧날이 시큰해졌다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다.
특히 넥타이를 몇 번 바꾸는 사이에 주름이 늘고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린 칼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그보다 더 촉촉하게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을 표현할 수 있을까? 

무기력하게 지내던 칼은 엘리와 공유했던 꿈을 혼자서라도 실현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리고 수천 개의 풍선을 달아 집을 공중에 띄워 남미의 파라다이스 폭포 절벽까지 날아가는 여정을 시작한다.
그러나 8살의 열정적인 소년 러셀이  그의 집에 무임승차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부터 모험은 꼬이기 시작한다.
이후 칼과 러셀은 티격태격, 좌충우돌 하며 위험천만의 소동과 모험을 함께 겪는다.
칼은 엘리와 이루지 못 한 지난 날의 꿈을 완수하는 것보다는 현재가 주는 모험과 사랑이 더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싸들고 왔던, 엘리의 추억이 깃든 물건들을 집 밖으로 하나씩 버리며 과거의 추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위에서 썼지만 나이가 든다는 것은 살아온 날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뜻이다.

*픽사(PIXAR)가 만드는 애니메이션 영화는 늘 믿고 본다. 1995년부터 지금까지 22편을 제작하였다.
그 중에서도 아내와 나는 『업』과 『토이스토리 시리즈』, 그리고 『니모를 찾아서』를 좋아한다.
픽사의 영화는 그냥 아이들과 함께 모험에 집중해서 보아도, 어른들끼리 어떤 의미를 찾으며 보아도 좋다.


3. 로큰롤 인생


영화의 영어 제목은 YOUNG @ HEART』이다. 합창단의 이름이기도 하다. 언제나 '마음은 청춘'. 
영화는 2006년 "ALIVE AND WELL (건재하다)"라는 제목의 공연을 위해 "영앳하트"의 7주 간의 연습을 기록한 다큐이다.
합창단원은 73세부터 93세까지, 평균 나이 81세의 노인들이라 박자를 놓치는 건 예사고 가사를 외우는 것도 힘들어 한다.

노인들이 모였으니 있을 법한 지난 날의 구구절절한 사연은 없다.
오직 현재의 이야기만 있을 뿐이다. 미래도 합창단 관련해서만 간단히 언급될 뿐이다.
나이가 나이이니 만큼 건강이 문제다. 산소호흡기를 가지고 다니며 연습하는 사람도 있다.
자주 죽음이 가까이 있음을 담담히 이야기 한다. 연습 기간 중 2명의 단원이 삶을 마쳤다는 소식에도 슬픔은 과장되지 않는다.
변함없이 노래를 부를 뿐이다. 삶의 마지막 시간이 충만하고 유쾌해 보인다.
무상한 삶이기에 현재가 소중하다는 사실이 자연스레, 그러나 진하게 전해 온다.

LIGHT WILL GUIDE YOU HOME.
AND IGNITE YOUR BONES.
I WILL TRY TO FIX YOU.

동영상 속 노래 "FIX YOU"의 마지막 구절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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