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올바름(PC : 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말이 있다. 198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PC(정치적 올바름)는 말의 표현이나 용어의 사용에서, 인종・민족・종족・종교・성차별 등의 편견이 포함되지 않도록 하자는 주장을 나타낼 때 쓰는 말"이라고 나와있다.
예를 들면 "검둥이(Negro, Nigger, Black)" 를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 American)"으로, "아메리카 인디언"은 "아메리카 원주민(Native Americans)"으로, "외국인(Foreigner, Alien)"은 "비시민권자(Non-citizen)"로, 회장을 의미하는 "Chairman" 은 남성 중심의 단어이므로 "Chairperson"으로 바꾸는 부르자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언제부터인가 "청소부"를 "환경미화원"으로, 식모는 "가사도우미"로, "외국인 노동자"는 "이주 노동자"로, "여류 작가"는 그냥 "작가" 로 바꾸어 부르는 등 언어 순화란 이름으로 '정치적 올바름'을 실천하고 있다.
물론 새로운 단어가 새로운 상황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 대한 실질적인 환경 개선 없이 '무늬'만 바꾸는 것은 말장난일 수 있다.
하지만 표현의 변화도 변화이며 더 큰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사고는 사용하는 언어에 구속된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정치적 올바름'은 사회적 문제를 담은 차별적 단어의 순화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테면 이런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을까?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일본의 16강 행을 기원하느냐는 외국 기자들의 질문에 기성용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아시아팀들이 16강에 많이 진출했으면 좋겠어요. 아시아 축구가 계속 발전하고 있거든요. 한국은 아시아 최고의 팀 중 하나이고, 일본도 여기에 합류한다면 정말 멋진 일이 될 겁니다.”
한국 대표선수로서 이는 정중한 발언이었고 공식적인 인터뷰에서 할 수 있는 모범 답안이었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 일본 축구에 대해 생각하는 바는 달랐을 수도 있다. 기성용의 발언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었다.
(참조 : 코마노가 쏘아올린 기쁜 공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이 한창일 때 나는 미국에 거주했었고 아침 출근길에 만나는 이웃의 일본인 하라씨에게 비슷한 덕담을 건넨 적이 있다.
"일본이 3:0쯤의 완승을 거두고 8강에 오를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와 헤어져 혼자 차를 몰고 출근하면서 그런 '끔찍한' 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축구에 관한 한 편협한 '국수주의자'인 나는 솔직히 일본 축구가 모든 대회에서 지기를 바라고 있다.
하라씨를 향한 나의 덕담이 가식이고 위선이라고 비난 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위에 참조한 영국인 듀어든이 쓴 글의 지원이 없더라도 말이다. 속내를 터놓고 지내는 가까운 사이가 아닌 출퇴근 길에 잠시 만나는 인연의 일본인에게 나는 '정치적 올바름'을 견지했을 뿐이다. 내가(혹은 기성용도 나처럼) "3:0으로 일본 승리? 절대 안되지! 10대빵으로 져라 제발!"이라고 속내를 정직하게 말했다면 상황의 본질과는 상관없는 소란이 일었을 것이고 적절치 못한 처신이 되었을 것이다.
더 범위를 좁혀서 (혹은 확장을 해서) 직장 동료, 친구, 일가친척, 형제자매, 부모와 자식, 부부 사이까지 가까운 관계일수록 '정치적 올바름'은 더욱 필요해 보인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의 호의가 반복되면 당연을 넘어 권리로 받아들이는 잘못을 범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럴 때 최소한의 '정치적 올바름'은 형식이나 가식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된다.
그렇지 못할 때 관계는 기본부터 상처 받고 흔들리게 된다.
가수 박상민은 '세상의 말 다 지우니 사랑해요라는 말 하나 남는다'고 노래했다.
'정치적 올바름'의 말들은 '사랑해요' 직전에 남는 것들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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