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로운 생활을 위하여
“영조가 치매에 걸렸더군.”
식사 도중에 누군가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밥숟가락을 떠올리다가 나는
‘무슨 소린가?’ 하여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데 다른 누군가 별 일
아니라는 투로 더욱 황당한 대꾸를 했다.
“치매 걸린 지가 언젠데? 아마 한 달은 됐을 건데.”
“웬 영조?????......?”
나는 물음을 던졌지만 대답이 나오기 전에 또 다른 사람의 말이
이어지면서 식탁의 관심이 그쪽으로 쏠렸다.
“영조, 어제 저녁에 죽었어. 이 사람들아.”
그들은 연속극 「이산」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야기의 혼선은
한국의 정규방송보다 한달 쯤 늦은 위성 텔레비전으로 연속극을 보는 사람과
대여점에서 비디오를 빌려보는 사람, 그리고 인터넷에서 다운을 받아보는 사람들
간에 시차가 반영되고 있는 것이었다.
*위 사진 : 샌디에고 풍경 1
나는 영조가 치매가 걸렸다거나 죽었다는 연속극의 내용보다도 40대 후반을
넘긴 가장들이 머리를 맞대고 식사를 하는 시간에 연속극을 화제에 올렸다는 게
신기했다. 한국에서라면 대개 정치판 이야기나 불황의 경제, 아니면 골프무용담 등이
주종을 이루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산이 그렇게 재미가 있어?” 하고 묻자 “재미가 있어 본다기보다는 보게 되니까
재미있단 말이 맞지”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들 모두 한국에서는 별로 연속극을
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순한’ 외국 생활을 하다 보니
연속극을 보게 되었고, 보니까 재미있어졌다고 했다.
*위 사진 : 샌디에고 풍경 2
‘단순한’ 생활?
그들은 이곳(해외) 생활이란 게 회사와 집 그리고 교회와 골프장을 오가는 것이
전부라고 푸념조로 말했다. 식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한국이라고 해서
직장인의 일상이 이곳 샌디에고에서와 크게 다를 것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세상 어느 누구의 일상이든지 직장과 집을 오가며 남는 여가를
활용하는 것으로 동일하게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유독 이곳 사람들이 스스로를 한국에서보다 매우 단순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생활 자체가 특별히 단순하다기보다는 그 생활을 매우 한정적인 사람들과
공유한다는 데 있다고 보아야 하겠다.
한국에서는 회사생활과 개인생활이 분리되어 각각 만나는 대상이 다를 수 있다면,
이곳에서는 회사에서 매일 만나는 직장동료가 이웃이자 같은 교회 신도이며,
함께 헬스를 하거나 골프를 치는 사이이고, 또 그의 식구들과 외식과 여행을 함께
하는 것은 물론, 명절까지도 함께 보내며 상대의 집에 있는 ‘숟가락 숫자까지’ 알게 되는 것이다.
*위 사진 : 샌디에고 풍경 3
이처럼 각 생활공간을 독립적으로 구분하는 경계가 모호해질수록 은밀해야할
각자의 경험과 일상의 내용이 비슷해지고 서로 너무 잘 알게 되어 대화의
내용으로 올리기가 진부해지면서 그 틈을 텔레비전 연속극이 메우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날 이 후 나 역시 한국에서는 단 5분도 본 적이 없는
이산」을 약 한 달에 걸쳐 매일 저녁 집중적으로 본 끝에 송연이와 대수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고 마침내 ‘진도’를 따라잡게 되었다.
이산이 왕에 오르고부터는 보지 않았지만.
나는 일상이 반드시 다양해야만 바람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양하다는 의미가 어떤 거창한 혹은 놀라움의 깜짝 이벤트나
짜릿한 즐거움의 연속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아내와 함께 한적한 오솔길을 걷거나,
숨 몰아쉬며 언덕을 넘어 산을 오르는 것만으로
아니면 강물을 불게 물들이며 스러지는 노을을 보거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 모퉁이 찻집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시간만으로도 이제까지 내게 일상은 단순하면서도 다양하였고
삶은 늘 따뜻한 축복이 되었기 때문이다.
소탈한 마음으로 스스로 가꾸지 않으면 어디서나 시간은 아무 것도 쓰지
않은 흰 종이를 넘기는 것처럼 심심하고 권태로워질 뿐이다.
한국에서도 그랬지만 샌디에고에서도 아내와 나는 틈이 나는 대로 어딘가를 걷기로 했다.
걷는 것은 어느 곳에 오래 머무르는 행위이자
가슴 속에 그곳의 풍경을 담아 교감하는 감성이며
낯선 곳과 가장 쉽고 빠르게 친숙해지는 지혜이다.
샌디에고 걷기
푸른 하늘과 맑은 공기, 투명한 햇살 그리고 넓고 시원한 해변.
샌디에고의 자연은 아름답다. 아내와 나는 큰 불만이 없다. 그러면서도 가끔 말한다.
“북한산은 너무 큰 욕심이고 그냥 한국에서는 흔한 마을 뒤쪽의 이름 없는 야산
같은 산 하나만이라도 있었으면...”
물론 이곳 샌디에고에도 산은 있다. 그러나 한국처럼 나무와 숲이 있고 그 사이로
아담한 산책로가 있는 산이 아니라 대부분이 바위와 메마른 흙으로 이루어진 민둥산이다.
아니면 한해살이풀들만이 자랄 뿐이다. 그마저도 우기철인 겨울을 제외하고는 건조한 사막
기후에 일찌감치 누렇게 퇴색하여 메마르고 팍팍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가을철이면
캘리포니아에서 자주 일어나는 대형 산불은 바로 이 메마를 풀들에 기인한다.
강렬한 햇살에 바싹 마른 풀들은 한번 불이 붙으면 마치 화약고와 같아지는 것이다.
아직 이곳에서의 생활이 짧아 멀리 가보지 않은 탓일 것이다. 프리웨이를 타고
먼 길을 가면 우리나라의 산보다 깊고 높은 산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서울에서처럼
불과 지하철 몇 정거장 거리의 지척에 있는, 정감어린 아기자기한 산은 없다.
물이 귀한 사막 기후라 한강처럼 도심을 가르는 강도 없고 강이 없으니
운치 있는 강변길이 있을 리 없다.
언제까지 두고 온 내 나라의 풍경에 대한 집착만 할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익숙한 산과 강이 아니더라도 하려고드니 산책을 할 곳은 천지였다. (트레킹이라 하면 너무
거창해 보여서 아내와 그냥 산책이라 부르기로 했다.) 집 주변의 크고 작은 공원과
바다를 보며 걷는 시원스런 해변길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그 중 몇 곳을 사진과 함께 올려본다.
1. 발보아 파크 (BALBOA PARK)
이 공원이 문을 연 것이 1868년이라고 한다.
오랜 역사를 지닌 만큼 넓은 부지 위에 아름드리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고
곳곳에 십여 개의 각종 박물관과 식물원, 미술관에 크고 작은 정원들이 들어서 있다.
건물들의 외관도 저마다 특색이 있어 산책길이 ‘외국에 온 기분’이 난다.
*위 사진 : 샌디에고 미술관 내부
샌디에고에 살게 되었으니 자주 찾을 것으로 생각하며 개별적인 박물관 관람에
집중하지 않고 공원 전체를 개괄적으로 둘러본다는 생각으로 걸어보았다.
공원이 넓다보니 그것만으로도 서너 시간이 걸렸다. 다양한 종의 선인장이 있는
데져트공원과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깔끔한 미술관이 인상적이었다.
2. 포인트 로마 POINT LOMA
1542년 포루투갈의 카브리요(CABRILLIO)란 탐험가가 백인으로서는 처음 상륙한 장소라고 한다.
그것이 기념할만한 일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태평양과 샌디에고만(灣)의 시원스런 풍경이 압권이어서 인 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곳은 “카브리요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작은 등대 건물도 소답스럽다.
아내와 나는 등대에서 샌디에고만을 향해 바다 가까이 내려가는 길을 따라 걸었다.
왕복 7-80분 걸리는 짧은 산책이었다. 경사가 급하지 않고 길이 넓게 닦여 있어 발걸음이 가볍다.
푸른 바다 위로 흰색 물거품을 꼬리처럼 달고 미끄러지는 요트를 보며 내려갔다가 등대를 보며
되돌아오는 길은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3. 스위트워터 리버 트레일 SWEETWATER RIVER TRAIL
*위 사진 : 방울뱀. 어떻게 주의를 하라는 것인지?...
'리버'라는 이름에 합당한 강 풍경은 어디에도 없고 커다란 저수지 주변을 걷는 코스이다.
한국과는 달리 이월 중순에 벌써 산중턱까지 노란 유채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잘 닦여진 코스임에도 방향을 잘못 잡고 거꾸로 가다가 한 흑인 할아버지를 만나서
제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동부출신의 마음씨 좋아 보이는 할아버지는 샌디에고의
해군기지에서 복무를 하고 이곳 날씨가 좋아 은퇴 후 아예 이곳에서 살게 되었다고 했다.
걷기 도중에 만나는 이곳 사람들의 인사는 대부분 눈웃음에 “하이!” 하는 정도지만
발음과 억양이 밝고 경쾌해서 듣는 사람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어떤 사람은 이곳 사람들의 그런 인사 행태를 두고 마음 속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단순히 습관화된 행동일 뿐이라며 큰 의미를 붙일 필요가 없다고 평가절하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 생각엔 그것이 비록 표면적인 행동이라 할지라도 없는 것보다는 좋아보였다.
일례로 내가 한국에서 아침 조깅길에 낯모르는 아가씨나 아줌마에게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하고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네는 상황을 생각하면 쉽게 수긍이 갈 것이다.
아마 나는 많은 경우 긴장된 얼굴과 수상한 눈초리로 응답을 받기가 일쑤 일 것이다.
어느 것이 더 나은 사회적 관습인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다.
우리에게 ‘미친소’ 고기를 강요하는(?) 미국이 미울 뿐이지
내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까지 째려볼 필요는 없는 노릇이다.
4. 미션 베이 파크 MISSION BAY PARK
미션베이파크에서는 요트, 수상스키, 윈드서핑 등 거의 모든 해양 스포츠와 골프, 자전거,
달리기 등이 육상 운동이 가능하다. 힐튼과 하이얏 등의 이름 꽤나 알려진 대형 호텔이 집중되어 있기도 하다.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길은 주변의 초록의 잔디와 어우러져 아름답고 편안하다.
잔디밭에는 어른과 아이들이 어울려 식탁과 의자를 늘어놓고 왁자지껄한 웃음을 하늘로 올리곤 한다.
3월 초 아내가 한국에 가기 전 왕복 서너 시간 동안 이곳을 걸었다.
그때 나는 아내에 한국에 있는 텐트를 가져와야겠다고 말했다.
20년이 된 구식 텐트지만 주말이면 식탁과 파라솔과 함께 이곳 잔디밭에 쳐놓고
밥을 지어먹거나 책을 읽으며 뒹굴면 더 없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5월 한국을 다녀오면서 나는 기어코 창고 속에 묵혀 두었던 옛 배낭과 텐트를 꺼냈다.
아내는 그 무거운 걸 가지고 가느니 차라리 미국에서 새 걸 하나 사자고 내게
눈총을 주었지만 나는 해외로 나가는 산악원정대처럼 꿋꿋하게 지고 왔다.
기능성은 근래의 제품에 비해 떨어지겠지만 우리 가족의 추억이 배어있는 장비와 함께
부지런히 샌디에고의 이곳저곳을 쏘다니다 보면 위의 네 곳보다 더 좋은 곳들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믿어본다.
(20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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