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과 사진/미국

팜스프링스에서 보낸 2박3일(상)

by 장돌뱅이. 2012. 4. 26.

귀에 익숙한 미국의 지명
미국에 와서 살면서 새삼 느끼는 거지만 가본 적도 없고 그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생각해보면 귀에 익은 미국의 지명이 참 많다.
예를 들어 스와니강.
일 삼아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더니 그 위치를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 강 이름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고 모두 포스터라는
미국 작곡가의 노래를 통해 알고 있었다.
 
 
머나먼 저곳 스와니 강물 그리워라
  날 사랑하는 부모형제 이 몸을 기다려
  이 세상에 정처없는 나그네의 길
  아 그리워라 날 설던 곳 머나먼 옛고향
 


말할 것도 없이 초중고 동안에 이루어진 교육의 효과이다. 해방과 전쟁 그리고 분단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현대사에 끼친 미국의 영향은 실로 강력하여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정치, 경제, 문화에 걸쳐 스며들지 않는 분야가 없다. 그 와중에 미국의 지명은 저절로
익숙해질 수 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위 사진 : 샌디에고 미션베이 풍경. 미국으로 출장 다니기 전엔 샌디에고가 어디에 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어디 스와니강뿐이랴. 다른 예를 들자면 끝도 없다.

‘멀고먼 앨라배마 나의 고향은 그곳’의 앨라배마가 어디에 있는지, 켄터기 치킨의
켄터기가, 테네시 월츠의 테네시가, 허클베리핀이 뗏목을 모험을 한 미시시피강이,
존덴버의 노래 ‘로키마운틴하이’의 로키마운틴이,
심지어 하바드나 예일대학조차도 말로만 많이 들었지 실제로 어디에 있는지,
나는 잘 모른다. UCLA가 엘에이에 있는 대학이라는 것도 잘 몰랐으니 그것을
‘우크라’대학이라고 읽었다는 어떤 연예인과 별반 다르지 않다. 메이져리그에서 활약
중인 추신수선수의 클리블랜드는 알아도 정작 클리블랜드의 위치를 나는 지도상에서
찾아 본 적이 없다.

한 때 미국의 지명은 우리나라의 대중가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뷔너스 동상을 얼싸안고 소근대는 별그림자 
   금문교 푸른 물에 찰랑대며 춤춘다 
   불러라 샌프란시스코야 태평양 로맨스야 
   나는야 꿈을 꾸는 나는야 꿈을 꾸는 아메리칸 아가씨.(1절) 

   메트로포리탄 오페라에 손짓하는 님 그림자
   달콤한 그 키스에 쌍고동이 울린다
   불러라 샌프란시스코야 태평양로맨스야
   나이트여객기도 나이트여객기도 유성같이 나른다.(3절)
            -1952년 장세정의 노래, 「샌프란시스코」-

“메트로포리탄 오페라”와 “나이트여객기”란 가사가 재미있는 이 노래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밤비행기 대신 쓴 나이트여객기란
말에 웃음이 나온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식의 처절한 곡조와 가사의 노래가 불러지던 때와 거의 같은
50년대에 만들어진 노래다.

남의 나라를 빌려서라도 전쟁의 비참함과 삶의 고단함을
잊고 위로 받고 싶은 대중들의
소망이 부유하고 강대한 미국에 대한 선망과 동경으로 표출된 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미국에 관한 대중가요가 대체적으로 밝고
경쾌한 분위기를 띄고 있다는
것도 그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문화평론가 이영미는 한국에 앉아서 미국의 노래를 만드는 50년대의 ‘기발함’을
지적하고, “샌프란시스코에 웬 뷔너스 동상?” 이냐고 반문하면서 다음과 같은 평을
남긴 바 있다. ( ‘뷔너스’도 비너스라고 해야 우리 표기법에 맞다고 한다.) 

 
 이 노래에서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느껴진다. 미국과 관련 있는 말이나 영어 단어를 
   몇 구절에 한번씩 넣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말이다. 비너스, 금문교, 샌프란시스코, 
   태평양, 로맨스, 아메리칸 등등. 마음으로는 버터냄새를 풍기고 싶어 죽겠는데, 
   몸과 입은 아무리 해도 자장면이나 야끼만두 냄새 밖에 못 풍기고 그속에서 
   김치냄새가 풀풀 풍겨나온다.
 
                      -이영미 지음,『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 중에서 -

시기적으로는 위 노래보다는 한참 뒤인  70년대 말인가 80년대 초에 불려졌던
나성(羅城)에 가면이란 노래도 좀 더 세련된 가사와 곡조를 지니고 있지만
‘선망과 동경’이란 굴레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 / 꽃모자를 쓰고 사진을 찍어 보내요 
   나성에 가면 소식을 전해줘요 / 예쁜 차를 타고 행복을 찾아요 
   당신과 함께 있다하면 얼마나 좋을까 / 어울릴 거야 어디를 가도 반짝거릴 텐데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 / 함께 못가서 정말 미안해요 
   나성에 가면 소식을 전해줘요 / 안녕 안녕 내사랑

우리 사회가 미국의 실체에 대한 주체적인 자각을 하게 된 것은 치열한 민주화의
과정을 겪으면서부터였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세계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로 오랜 기간
‘미국과잉’내지는 ‘미국강박관념’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서론이 두서없이 길어졌지만 우리가 가보지도 않고 지도에서 찾아본 적도 없는
수많은 미국 지명에 익숙한 것도 따지고 보면 그 때문이다.


팜스프링스 (PALM SPRINGS)가는 길
아내와 내가 지난 2월 여행을 했던 팜스프링스(PALM SPRINGS)도 익숙한 지명중의
하나이다. 자세한 기억은 없지만 학창 시절 헐리우드 배우들과 관련한 소식으로
처음 귀에 익은 것 같다. 그 당시 보았던 ‘선데이서울’류의 잡지에는 수영복차림의
이름난 미국 여배우가 수영장 옆에 환한 웃음과 누워있는 화보와 함께 팜스프링스라는
지명이 더러 실리곤 했으니까.

그 팜스프링스의 정확한 위치를 알게 된 것은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부터이다.
아니 팜스프링스가 샌디에고에서 자동차로 2 -3시간 거리에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면서 그곳을 다녀와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이제까지 나는 팜스프링스가 기후적으로 온화한 어떤 곳, 일테면 플로리다 남부쯤이
아닐까 (플로리다가 기후가 온화한지 어떤지도 모르면서)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2월 하순 팜스프링스로 떠나는 날 비가 내렸다.
겨울이면 비가 내리는 날이 더러 있는 샌디에고의 날씨지만 올해는 유독 비가
많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예년 평균치의 서너 배가 내렸다고 하던가.
아파트 창문으로 비오는 거리를 내다보는 것을 좋아하듯 나는 비오는 날 운전도
좋아한다. 회색의 창밖 풍경에 어울림직한 차분한 음악이라도 틀어놓으면 아내와 함께
가는 차안 분위기가 한결 오붓하게 살아나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표현을 할 때마다 아내와 딸아이가 하는 말이 있다.
“장돌뱅이한테 여행가기 안 좋은 날씨가 있나?”
하긴 그렇다. 내게 모든 날씨는 여행하기에 좋은 날씨다.
그리고 여행이 그렇듯 아내와 딸아이와 함께 하는 모든 시간이 또한 그렇다.

팜스프링스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DESERT HILL PREMIUM OUTLET에 들렸다.
거대한 쇼핑단지였다. 들어본 적이 있는 상표와 그렇지 않은 상표의 상점들이 촘촘히 들어서 있었다.

“나이 오십이 됐으면 장돌뱅이 덕분에 ST. JOHN 정도는 입어야 하는 거 아닐까?”
아내는 농담에 뭔 말인가 하여 구경을 하러 들어갔다가 소심한 나는 조용히
나오고 말았다. 한국에서 ‘죤선생’(?)표를 사보았다면 가격이 싸게 느껴졌을지도 모르지만
아울렛 상점에 붙어 있는 가격표에 비해 내 지갑은 너무 얇았다.
그런 나를 안쓰럽게(?) 보던 아내는 자신의 것이 아닌 딸아이를 위한 “TRUE
RELIGION”이란 청바지 하나만을 샀다. 지난 1월 귀국하기 전 딸아이가
가지고 싶어 했던 걸 아내는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깨진 영어'(BROKEN ENGLISH)를 위한 변명
*위 사진 : 팜스프링스로 들어가는 길목의 풍력발전기

10번 프리웨이를 벗어나 팜스프링스로 접어들면서 나는 인터넷에서 프린트 해둔
길안내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숙소인 CASA CODY에 전화를 걸어
가는 방법을 물어보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전화를 받아서 안내해주는 여성의
영어발음은 친절하고 다정함이 묻어나는 억양에도 불구하고 알아듣기 힘들었다.

좀 천천히 말해주시겠냐고 나는 자존심(?)을 구기며 초라한 영어실력을 고백했고
그녀가 거기에 친절을 베풀었음에도 마찬가지였다. 대충 알아먹은 단어 몇 개로 
추리를 해서 가려고 차를 몰았으나 숙소로 가는 길은 찾을 수 없었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아까와는 다른 사람이 전화를 받았다.
다행이 발음이 좀 더 분명하게 들렸다.
그녀의 안내를 따라 이번에는 숙소인 CASA CODY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뭐야. 이렇게 간단한데. 앞선 여자는 영어 발음과 설명이 개판이야.”
나는 필요이상으로 흥분하며 아내 앞에서 구겨진 나의 영어 실력을 만회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피차 ‘제2외국어’로 영어를 쓰는 동남아에서야 그럭저럭
소통을 하던 나의 영어가 ‘본토’에 와서는 부딪히는 ‘원어’ 앞에서는 부쩍
“익스큐스미?”와 “파든미?”를 자주 사용하며 꼬리를 내린다는 사실을.

잘못은 그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본토 영어'에 자주 ‘사오정’이 되어버리는 나의
귀에 있는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성문종합영어(우리 때는 ‘정통종합영어’였다.)도
못보고 난이도에서 훨씬 등급이 낮은 성문(정통)기본영어에 만족했던 나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위 사진 : 팜스프링스 도로변 풍경. 나의 엉터리 영어 덕에 길을 따라 오르내리며 찍은 사진.

20년 가까이 해외영업을 해온 사람으로서 어쩌면 부끄러운 고백일 수도 있지만
나는 뭐 그리 크게 기죽지 않는다. 적어도 영어 때문에 계약을 취소당하거나
부속조건을 잘못 해석하여 엉뚱한 클레임을 먹은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누가 한다고 해도 그럴 일은 없었을 것이다. 수출이라니까 뭔가 그럴 듯 해
보이지만
거의 정형화된 문장을 일의 진행에 따라 순서적으로 주고받는 일일 뿐이다.
거기에 얼굴을
대면하는 미팅에선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라는
말을 공손하게 자주 사용할 수 있는 뻔뻔함만(?) 있으면 하급 철강류를 팔고 다니는
장돌뱅이질’은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다. 오렌지를 ‘어륀지’로 발음하는 것보다는
확실히 쉬운 일이었다.


한국에 부는 ‘영어 광풍’은 이른바 ‘세계화’라는 시장 논리에 탄력을 받은 듯하다.
심지어 영어공용화라는 ‘문화자살론’ 까지 주장되는 것을 보면 ‘광풍’이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국제 언어로 영어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지만 저마다 자기
생활에 맞는 정도의 영어면 되는 것 아닐까? 누구나가 다 소고기수입건을 협상하거나
미국무성 초청으로 노스웨스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가야 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가난하던 시절 우리는 “미국에서는 거지도 미제를 쓴다”는 우스갯말로 미국의 풍요를
부러워했다. 이제는 “미국에서는 거지도 영어를 쓴다”는 농담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영어는 결코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만능열쇠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어보다 영어로 전달하고 소통하려는 ‘그 무엇’이며, ‘그 무엇’이 지닌
가치를 판단하는 안목과 사고력이다. 그런 바탕이 없다면 아무리 ‘어륀지’라고 매끄럽게
혀를 굴려보아도 그저 ‘말 잘하는 반벙어리’ 밖에 될 수 없을 것이다.


아내가 좋아하는 숙소, 까사코디(CASA CODY)

애초 내가 INN이라는 등급의 숙소를 잡았을 때 아내는 내색 하지는 않으면서도
약간의 걱정과 불만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내가 평소 럭셔리한 호텔만을 고집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고집한다고 될 수 있는 장돌뱅이의 능력도 아니고) 둘이서 하는
첫 미국여행인데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곳으로 가자 하니 썩 내키지 않았던 것 같다.

비록 HOLIDAY ‘INN’ 수준은 아니어도 한국의 ‘인숙이네집’ 같은 분위기는 아니라는
나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더비치(THE BEACH)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찾아들던 태국 방콕 까오산의 어느 싸구려 숙소를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까사코디는 팜스프링스의 대로변에서 물러선 뒤쪽 소로의 길가에 있는 숙소였다.
마치 오래된 가정집 같은 평범한 외관을 지니고 있었다.
그럴 듯한 현관이나 로비도 없었고 간판도 작아서 초행자라면 지나치기 십상이었다.
관리실의 문을 두드리니 안채에서 초로의 할머니가 나와 반갑게 맞아주었다.

체크인을 마치고 할머니의 설명으로 들으며 마당을 돌아서 우리 방으로 함께 걸어갔다.
숙소의 붉은 지붕 너머로 샌 하신토(SAN JACINTO) 산의 윗분분이 올려다 보였다.
마당엔 초록의 잔디가 깔려 있었고 숙소와 숙소 사이에 작은 수영장이 있었다.
숙소의 벽은 모두 깔끔한 흰색이었다. 모든 것이 기대 이상이었다.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이틀밤을 지낼 숙소의 문을 열었다.

까사코디에 대해서는 아내가 이미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좀 더 세부적인 설명은 그 글로 대신한다. 

   2시간 반 정도 운전을 하여 찾아간 우리의 숙소 'CASA CODY' 
   가정집의 문을 열듯 문을 열고 들어간 마당에는 푸른 잔디에 조그만 수영장, 
   그리고 예쁜 알록달록한 자그마한 꽃, 군데군데 서있는 커다란 나무에는 귤, 레몬, 
   그리고 이름 모르는 과일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지금까지의 걱정을 한순간에 모두 씻어주는 정다운 풍경.
   우리 방을 찾아가는 동안 우리는 한껏 기분이 좋아졌다. 
   어머니가 정갈하게 치워놓은 것 같은 우리의 방. 
   오래되었으나 그래서 더 정이 가는 그런 방안이었다.

   우리는 CASA CODY 에서의 산책을 좋아했다. 아침에도, 저녁때도, 한밤중에도. 
   수영장가에 앉아 까만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말없이 앉아있는 것도 좋아했다. 
   나의 손을 꼭 잡고 나즈막히 들려주는 남편의 노랫소리가 잘 어울리는 그런 집. 
   CASA CODY는 그런 곳이었다. 
                                                       - 아내의 글 중에서 -


식당 "FISHERMAN'S MARKET AND GRILL"

방에 들어 하릴 없이 뒹굴거리며 얼마쯤의 시간을 보내자 배가 고파왔다.
팜스프링스 소식지를 펼쳐 식당 안내란을 찾아들었다. “ FISHERMAN'S...
(760-327-1766)” 는 그래서 찾아간 곳이다. 일대에서 유명한 곳인지 사람들이
입구에서 긴 줄을 만들고 있었다.

그 대열 속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읽어본 식당 안내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평소 고기를 잡아 주변사람들과 나누어 먹기를 좋아하던 루이스 LOUISE PAGANO와
빌 BILL MORTZ 이 "WHAT WOULD HAPPEN IF WE OPENED A FRESH FISH MARKET
& GRILL, SERVED ONLY THE BEST OF THE CATCH IN A RELAXED ATMOSPHERE
AND DID IT IN...THE DESERT?"
라는 생각으로 의기투합을 한 후 11년 만에 이 식당을

팜스프링스 최고의 씨푸드식당으로 만들었고 주변에 4개의 분점을 거느리게 했다고.

아내와 내겐 떠들썩한 분위기면서도 도를 넘지 않아 흥겹게 느껴지는 식당이었다.
“꼭 외국에 와있는 것 같애!”
아내는 미국시민권자도 아니면서 기분이 좋은 분위기라는 걸 좀 이상하게 표현했다.
나도 맞장구를 치며 그 이상한 세계 속으로 들어갔다.
“그래 음식맛도 꼭 외국음식 같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