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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미국

PCH를 따라 2. - 꽃의 도시, 롬폭

by 장돌뱅이. 2012. 4. 26.

길 위에서
“으악! 벌써 5시야! 빨리 일어나!”
아내의 놀란 외침이 조용하던 새벽 집안을 흔들었다.
나도 덩달아 놀라 몸을 일으키며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왜 알람이 안울렸지?”
나는 새벽 3시 반에 울리도록 맞추어 놓은 핸드폰을 열어 보았다.
“이런! 쯧쯧쯧...”

시간은 제대로 맞추어져 있었으나 일자가 주말이 아닌 주중으로 되어있었다.
사실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에 긴장한 탓인지 진즉부터 잠이 깨어 있었다.
단지 눈을 감고 자리에 누워 알람이 울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데
어쩐지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더라니...

우리는 이른 새벽에 느닷없는 비상이 걸린 군대 내무반처럼
부산을 피운 끝에 5시 20분에 출발을 할 수 있었다.
간밤에 모든 짐을 싸둔 터라 간단한 세면만으로 출발이 가능했다.
예정보다 1시간 이상이 늦은 출발이었지만 여전히 이른 새벽이었고
출발이라는 기대감이 더해져 느낌은 신선했다.

도로는 안개가 짙게 끼어 있었다.
낮과 밤의 기온차가 심한 이곳 날씨가 만들어내는 아침행사였다.

뜨물 같은 부유물에 가려져 있다가 다가갈수록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차창 밖의 풍경은 낯익은 도로임에도 신비롭게 보였다.
우리가 달려가는 먼 곳의 낯선 거리 산타바바라 SANTA BABARA 도 그렇게 다가올 것이다.

우리는 정신없던 새벽을 잊고 이내 느긋한 자세로 돌아갔다.
아내가 음반을 밀어 넣었다.
어떤 사람은 비가 올 때와 맑을 때
혹은 기분 좋을 때와 나쁠 때,
아침이나 저녁 등으로 음악을 구분하여 준비한다지만
아내와 나는 여행할 때 7080 노래에,
옛팝송(딸아이의 표현 대로 하자면 지하철 판매원에게서 자주 들을 수 있는),
클래식, 재즈, 시대와 맞지 않는 80년대 운동권가요, 젓가락 장단의 뽕짝,
판소리, 동요 그리고 만화영화주제가까지 우리가 아는 모든 장르를 무작위,
무순서로 녹음한 삼십여 장의 씨디에 번호를 매겨 순서대로 듣고 다닌다.

이 날 아침엔 송창식의 “날이 갈수록”을 들을 수 있었다.
여행을 시작하는 아침에 듣는 노래로서는 너무 느린 곡조에다가
처량하고 청승맞기까지 한, 거기에다가 계절적으로도 맞지 않는
70년대 노래지만 아내와 나는 이 노래를 좋아한다.

   가을잎 찬바람에 흩어져 날리면
   캠퍼스 잔디 위엔 또다시 황금물결
   잊을 수 없는 얼굴 얼굴 얼굴 얼굴들
   루루루루 꽃이 지네 루루루루 가을이
가네

   하늘엔 조각구름 무정한 세월이여
   꽃잎이 떨어지니 젊음도 곧 가겠지
   머물 수 없는 시절 시절 시절 시절들
   루루루루 세월이 가네 루루루루 젊음도 가네

오래 전 고인이 된 하길종 감독의 영화 “바보들의 행진”에 삽입된 노래였던가?
우리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아직 잠이 덜 깬 목청을 돋구어보았다.
그리고 젊은 시절에 이 노래를 부르면 세월 따라 덧없이 가는 듯한
'바보 같은' 젊음이 서러웠던 것 같았는데, 나이가 들어서 불러보니
아직도 보내야 할 '바보 같은' 젊음이 남아 있는 것 같다며
이른 아침 길 위에서 아내와 함께 웃었다.
아내도 나도 함께 ‘지천명’의 나이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롬폭 LOMPOC 의 꽃, 꽃, 꽃
산타바바라로 가는 길은 PCH(태평양연안하이웨이)를 경유하지 않고
805 - 405 - 101번 프리웨이를 바꾸어 타며 가기로 했다.
목적지로의 신속한 이동을 생각해서였다.
101번 도로와 PCH가 합쳐지는 구간을 제외한 PCH는
돌아오는 길에 지나기로 했다.


*위 사진 : 앤더슨 식당의 PEA SOUP

두 번의 휴식을 포함하여 다섯 시간의 운전 끝에 우리는 101번과 246번 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도착했다. 그곳에 가까이에 있는 식당 ANDERSON'S 가 아침 식사 예정지였다.
론리플래닛이나 각종 인터넷에 언급되어 있는 유명 식당이었다.
우리는 이 식당의 전문 음식인 PEA SOUP을 주문했다.
녹두죽 같은 구수한 맛의 PEA SOUP은 새벽길을 달려와 출출해진 우리의 속을 알맞게 진정시켜 주었다.


*위 사진 : 캘리포니아의 7월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246번 도로를 타고 롬폭으로 향했다.
7월이면 한국은 녹음이 절정으로 치닫는 계절이지만
이곳의 일년생 풀들은 벌써 누렇게 시들어가며 늦가을의 서정을 피워내고 있었다.
롬폭은 산타바바라에서 서북쪽으로 55마일 떨어져 있는 작은 도시로
캘리포니아 최대의 꽃과 꽃씨를 생산하는 지역이다.
이번 여행의 주요 목적지는 산타바바라지만 롬폭을 반환점으로 삼은 이유가
그 꽃을 보기 위함이었다.

롬폭의 꽃은 6월말이 절정이며 그 시기에 맞춰 FLOWER FESTIVAL도 열린다고
한다. 때문에 7월에 방문하는 우리로서는 ‘화무십일홍’이라는 옛말을 떠올리며
이미 철을 지난 것이 아닌가 걱정을 해야만 했다.

실제로 꽃밭이었던 듯 한 일부의 드넓은 밭들이 새로운 작물을 위해 파헤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곳저곳에 우리가 감탄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꽃이 남아있었다.

안개는 햇빛에 밀려 어느 새 멀리 지평선 끝이나 산등성이께에서 희미해져 있었다.
찬란한 햇빛 속에 찬란한 꽃밭이 드러났다.
그윽한 향기마저 감도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꽃밭이었다.
아름다웠다.
아내와 그 속을 거닐었다.
다른 무슨 말이 필요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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