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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미국

그 곳, 요세미티 YOSEMITE

by 장돌뱅이. 2012. 5. 3.

야간운전  
미국에서 여행을 하면서 야간출발은 이제 당연한 일이 되었다.
다소 무리가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월급장이에게 주어진 주말이라는 한정된 시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8시간 동안 대략 750KM 달려야 갈 수 있는 요세미티 역시 그렇다.
아침 출발이 상큼하기야 하겠지만 하루 종일 달린 끝에 저녁이 되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으로 온전한 하루를 소비하게 되면 주말여행객의 나머지 일정이 영 옹색해지고 마는 것이다.

퇴근을 하여 이른 저녁을 먹고 밤 열시에 출발을 하기 위해 잠시 눈을 붙였다.
억지로 자야 하는 잠은 원래 쉽게 들지 않는 법이지만
감기 기운이 있어서인지 어렵지 않게 잠이 들었다.
게다가 곤하게 잠든 나를 깨우기가 힘들어 망설인 아내 덕분에
10시가 지나서야 일어날 수 있었으니 저녁나절의 잠치곤 제법 깊고 오랜 잠이었다.

몸은 한결 가뿐했다. 한 시간 늦은 출발. 일정에 지장을 줄 지체는 아니었다.
프리웨이에 오르기 전 커피를 사러 스타벅스에 들렸더니 뒷정리를 하던 종업원이
문을 닫았다고 손사래를 치며 11시라고 쓰여 있는 영업시간표를 가리켰다.
‘겨우 5분 늦었는데...’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종업원이야 얼마나 기다리던
퇴근시간이겠는가. 평소 커피를 즐겨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것 한 가지를 빠트린
기분이었다. 늦은 밤 운전 중에 운전석 곁에 두고 한두 모금씩 홀짝거리는 맛이
쏠쏠했었는데 말이다.

어느 호사가의 수다였던가.
“커피를 블랙으로 마시는 사람은 고독의 맛을 아는 사람이고,
커피에 설탕 하나를 넣고 마시는 사람은 인생의 맛을 아는 사람이며,
커피에 설탕 둘을 넣고 마시는 사람은 사랑의 맛을 아는 사람이다” 라는 말.
그에 따르면 블랙으로도 마시고 설탕을 조금 넣거나 혹은 왕창 넣어서도 마시는 나는
고독과 인생, 그리고 사랑의 맛을 모두 알거나 아니면 어느 것도 모르는 사람이겠다.
그러나 내가 스타벅스를 찾은 이유는 그런 커피의 ‘깊은’ 맛을 알아서가 아니라
그저 단순히 야간 운전 중의 졸음을 조금이라도 방지해 보려는데 있었다.


*위 사진 : 야간운전 중에 주유를 하다보면 먼 길을 떠나는 기분이 더욱 새록새록해진다.

몇 번 해보니 야간운전이 반드시 졸음과의 사투를 벌여야 하는 괴로운 시간만은 아니었다.
밤이 깊어지고 도시에서 멀어질수록 도로는 완벽한 어둠 속에 잠겨든다.
오고가는 차들마저 줄어들면 나는 헤드라이트를 ‘먼불’로 바꾸고
일정한 주행속도를 유지해주는 크루져 장치를 가동시킨다.
가속기와 브레이크 페달을 번갈아가며 밟아야하는 부산함이 사라지면서
차는 한층 더 깊은 적막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럴 때면 귀에 들려오던 음악소리가 온몸을 향해 부드러운 비단자락처럼 휘감겨오고,
도로는 더 이상 우리의 진로를 규정하는 궤도에서 벗어나 아득한 우주 공간으로 변한다.
아내와 나는 그 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비행사가 되어 흐른다.
그리고 조용하게 숨어있던 온갖 상념들이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은
지혜가 되어 우수수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매력적인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

나는 지금 어떻게 여기에 있는가?
어떻게 미국이란 이 먼 땅에 오게 되었고, 또 이 밤 요세미티란 이름의
이제껏 가보지 못한 낯선 곳을 향해 가고 있는가?
결국 물음의 고리는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근원 같은 곳에서 멈춘다.
내 자신이 허공에 맴도는 한 조각의 가랑잎처럼 작고 왜소하게 느껴지는 지점이다.
때맞춰 오디오에서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이 ‘운명처럼’ 흘러나온다.

모든 일들이 운명적으로 이미 정해져 있다고 믿지는 않지만
한번도 미국 생활을 염원해 보지 않았다는 점에서부터 삶엔
나의 선택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해서 우연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무엇’ 말이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오늘은 어제 때문일 것이다.
그 어제는 그보다 앞선 어제 때문이고
‘앞선 어제’는 또 ‘어제의 어제’에 근거를 두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형태의 만남은 필연일 수밖에 없다.

문득 곁에 손을 잡을 수 있는 아내가 있다는 사실에 든든해진다.
아내는 참으로 오랜 시간을 같이한 운명이자 선택이며 친구이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되뇌어 본다. 외롭지 않다. 행복하다. 

   공통된 그 많은 추억, 함께 당한 그 많은 괴로운 시간,
   그토록 많은 불화, 그리고 화해, 마음의 격동이라는
   보물만큼 값어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런 우정들은 다시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들이다.
   참나무를 심었다고 오래지 않아 그 그늘 밑에
   쉬기를 바란다는 것은 헛된 일이 아닐 수 없다.
                      - 생텍쥐페리, 『인간의 대지』-


티오가 패스 TIOGA PASS
동이 틀 무렵 TIOGA PASS의 동쪽 입구에 있는 모노레이크 MONO LAKE 에 도착했다.
9월 중순에 이곳 아침 기온은 벌써 초겨울의 그것을 넘어서고 있었다.
반바지 차림으로 차문을 열고 나서자 다리에 감기는 냉랭함이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우리는 호수가에 차를 세우고 새날이 열리는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호수의 수면과 하늘을 밝게 비추며 다시 하루가 시작되었다.
떠오르는 해를 보고 아내와 나는 잠시 차안에서 눈을 붙였다.
밤을 달려온 피로가 아침 햇살에 따뜻하게 녹아들었다.

TIOGA PASS는 요세미티 밸리의 북쪽 산악지대를 동서로 관통하는 도로이다.
고지대를 지나는 도로이다 보니 겨울철에는 도로가 폐쇄된다. 이른 아침의 산길에는
맑은 호수에 서린 냉랭한  기운이 벌써부터 겨울의 눈과 얼음을 예감하고 있는 듯 했다.

곳곳에 마련된 야외용 식탁과 야영장에는 어김없이 야생 블랙곰에 대한 주의가 붙어
있었다. 주로 후각이 발달한 곰에 대비하여 음식물을 보관하는 주의에서부터 곰과
조우했을 경우나 곰이 접근할 경우에 대처하는 방법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곰에 의한 차량의 파손이나 인명의 위험에 대한 경고만이 아니라
자연을 자연대로 보존하려는 미국인들의 의지로 보였다.


*위 사진 : 티오가 도로 주변의 호수 풍경.

강화도에서 석모도로 건너가는 10여 분의 뱃길.
승객들이 던져주는 과자부스러기들을 먹으려는 수많은 갈매기들이 배 꽁무니를
따라붙는다. 그 갈매기들은 이미 스스로 먹이를 구하려 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들은 그것들을 ‘거지갈매기’라고 불렀지만 일부 매스컴에선 대단한 볼거리인양
수다를 떨기도 했다.

미국의 옐로스톤 국립공원의 예는 교훈적이다.
그곳에는 1950년대까지 곰이 매우 흔했다고 한다. 공원 측은 힘든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곰을 이용하기로 했다. 곰에게 먹이를 주는 체험을 상품으로 내건 것이다.
사람들은 곰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고 곰은 사람들이 주는 먹이를 먹기 위해
야영장과 도로로 몰려들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공원엔 굶어 죽는 곰들이 나타났다.
스스로 자연에서 먹이를 구하는 방법을 잊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배가 고파진 곰은 심지어 사람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곰이 멸종 위기에 처한 상황이
되어서야 곰들에게 먹이를 주는 행위가 금지되었다. 지금 미국에선 곰뿐만이 아니라
모든 야생동물에게 먹이를 주는 행위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자연은 인간에 의한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공존해야할 대상이며
인간이 돌아가야 할 귀착점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간단하다.
"KEEP WILDLIFE WILD!"


요세미티 밸리 YOSEMITE VALLEY

*위 사진 : 요세미티 밸리 입구에서 본 풍경.

미국서부를 남북으로 달리는 시에라네바다 SIERRA NEVADA 산맥의 일부를 이루는
요세미티는 해발 609미터에서 3,962미터에 이르는 다양한 높낮이를 품고 우리나라의
충청북도만한 넓이를 지녔다. 요세미티국립공원의 중심이라 할 요세미티밸리에 들어서면
우선 엘 캐피탄 EL CAPTIAN 이나 하프돔 HALF DOME 같은 거대한 바위봉우리들에

압도 당하게 된다. 생성의 역사 또한 덩치에 어울리게 무려 5억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특히 엎어놓은 둥근 바가지를 수직으로 자른 듯한 하프돔은 그 높이가 해발 3천 미터에
이르며 계곡 바닥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1000미터를 훨씬 넘어 아득하기만 할 뿐이다.


*위 사진 : 요세미티 밸리의 이곳저곳.

그 바위 계곡의 곳곳에는 겨우내 산 정상부에 쌓였던 눈이 녹으며 흘러내리는 물이
봄부터 여름까지 절경의 폭포를 이룬다고 하지만 이번 9월 중순에 찾았을 때는
대부분 말라버린 뒤였다. 아쉬움이 없진 않았지만 그 나머지만으로도 요세미티는
아내와 내게 풍요롭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요세미티 밸리를 도는 무료셔틀 버스 안에서 뉴욕에서 왔다는 한 사내가 우리에게
버널폭포 VERNAL FALL 를 추천했다. 아직 그곳에는 작은 물줄기나마 흐른다는 것이
추천 이유였다. 어차피 간단한 트레킹 한두 곳을 생각한 터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위 사진 : 버널 폭포로 가는 길은 서울 근교의 산을 오르는 길목과 흡사했다.

버널폭포로 가는 길은 초행길임에도 낯설지 않았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과 바위 초록의 나무 그 사이를 지나는 사람들의 발걸음에
닳아진 길 등이 마치 북한산의 어느 계곡을 오르는 듯 눈에 익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흔했던만큼 아내와 나의 정서 속에는 더욱 깊게 각인되었으리라.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냥 반갑고 위안이 되는 - 고향은 그런 곳인가 보다. 


*위 사진 : 버널 포포

삶의 근거지로 다른 나라의 어떤 장소를 선택하는 이유가 단순히 익숙한 자연환경에만
있지는 않겠지만 매우 추운 미네소타주로 노르웨이 사람들이, 고온다습한 텍사스주의
걸프해안으로 베트남 사람들이, 그리고 산악이 발달한 캔터키 동부로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온 사람들이 찾아갔다는 속설도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버널폭포의 물줄기는 사진으로 보던 한창 때에 비해 현저히 약해져 있었다.
그래서 더욱 ‘동양적’이고 ‘한국적’으로 보였다.  


*위 사진 : 하프돔 (앤젤 아담스의 사진 인용)

폭포에서 내려와 미러레이크 MIRROR LAKE 를 찾아갔다.
잔잔한 거울 같은 수면에 비친 하프돔을 그려보았지만 호수 역시 물이 완전히 말라
모래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모래밭에 서서 병풍처럼 둘러선 하프돔을 올려다보았다.
고개가 뒤로 젖혀져야 끝이 보일 정도로 하프돔의 경사는 가팔랐다.
그 웅장함에 비해 하프돔은 애잔한 전설을 담고 있다. 


*위 사진 : 미러레이크에서. 뒷쪽에 보이는 바위가 하프돔이다.

요세미티 계곡에 살던 원주민의 청년이 먼 모노레이크 MONO LAKE까지 나아가
그곳에 살던 부족의 아가씨로 신부로 맞이했다. 신랑을 따라 계곡으로 돌아오는
길은 신부에게 너무 힘이 들었다. 마침내 지금의 미러레이크 부근에 이르렀을 때  
신부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신랑은 그럴 수 없다고 붙잡았다.

두 사람이 다투는 소리에 화가 난 산신령은 둘을 바위로 만들어 버렸다.
신부는 하프돔이 되었고 신랑은 그와 마주 보고 있는 노스돔 NORTH DOME 이
되었다. 신부의 눈물은 하프돔의 표명에 수직으로 그어진 선이 되어 남았고
그녀가 흘린 눈물은 미러레이크의 물이 되어 고였다.

여자들의 시집살이가 고된 건 동서양을 막론하고 같았나보다 하고 아내와 웃다가
문득 그것이 북미인디언의 슬픈 운명을 상징하는 전설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1851년 백인 군대 2백여 명이 오기 전까지 요세미티에는 야화니치 AHWANECHEE 라
불리는 인디언들이 무려 4천년 동안 살아오고 있었다고 한다.
백인과의 만남 이후의 역사는 재삼 거론할 필요가 없겠다.
누구나 알고 있듯, 문명과 교화란 미명으로 저질러진 살육과 추방,
그리고 삶의 박제화...
무엇보다 ‘인도 사람’이라는 의미의 인디언이란 이름조차 얼마나 일방적이고 황당한가. 

숙소인 와오나호텔 WAWONA HOTEL 은 요세미티의 남쪽 출입구 근처에 있었다.
1800년대에 지어져 캘리포니아에서도 가장 오래된 숙소 중의 하나이다.
오래되었다는 것과 낡았다는 것과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아도 좋겠지만
이곳은 이곳저곳의 낡은 부분들이 너무 쉽게 드러나 보였다. 가격에 따른 차별이라
해도 화장실과 욕실을 공동으로 사용해야 하는 불편함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세세한 사항을 오래 느끼기에 우리의 몸은 너무 지쳐 있었다.
호텔 식당에서 식사를 하자마자 우리는 밤하늘의 별을 보자는 다짐도 헛되이
누가 말릴 틈도 없이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마리포사 글로브 MARIPOSA GLOVE와 글래셔 포인트 GLACIER POINT
이튿날의 일정은 마리포사 글로브와 글래셔 포인트, 두 곳뿐이었다.
아침을 먹고 호텔에서 먼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마리포사 글로브로 향했다.
캘리포니아에서만 자라는 자이안트 세쿼이어 GIANT SEQUOIA (거대한 나무)의 숲이다.
승용차 대신에 무료 셔틀버스를 타고 가라는 호텔 종업원의 충고를 받아들여 호텔 옆
정거장에서 버스로 이동했다. 쾌적하고 안락한 버스였다. 운전기사도 더없이 친절했다.

숲길은 직접 걸어서 돌아보는 것이 제 맛이겠지만 시간을 단축해야 하는 사정으로
숲을 도는 유료 트램에 올랐다. 이어폰으로 해설을 들으며 1시간 남짓 숲을 도는
투어였다. 중간 두 번의 정차 시간이 있어 유명한 나무를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위 사진 : 마리포사를 돌아보는 트램 투어

트램투어는 편안하고 신속하게 숲을 볼 수 있는 장점은 있었지만 또 다시 이곳에 온다면
이용하지 않을 방법이기도 했다. 그것이 비록 나무라도 해도 3천년 동안이나
그 자리에서 살아온 까마득한 인생 선배에게 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요세미티가 국립공원으로 승격을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자연주의자 존 뮤어
JOHN MUIR 가 말했던 대로 마리포사의 “나무들은 마치 다른 별에서 갓 도착한
어떤 초월적 존재자들인 양 고요하고 화사하고 신적인 모습”이었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 초록의 숲과 맑은 햇살, 그리고 싱그러운 바람...
감동적이지 않은 숲이 있겠는가마는 마리포사는 그 감동의 강도와 폭이 강력했다.
생명의 신성한 기운으로 가득한 고목 앞에 서 있는 아내에게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자
아내는 김치나 치즈를 부르지 않았는데도 환하게 웃었다.


*위 사진 : 글래셔 포인트에서의 조망.

글래셔 포인트로 가는 길도 울창한 숲을 지나며 이어졌다.
길의 끝에 있는 글래셔 포인트는 요세미티 여행의 완결이자 정점이었다.
그곳에서는 우리가 하루 전에 보고 다녔던 요세미티 계곡의 폭포와 바위가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눈길 닿는 곳까지 산 능선은 굽이굽이 출렁이고 있었고
하늘은 한껏 넓어져 있었다.
한마디로 장쾌한 풍경이었다.

   자연과 평화는 태양이 나무 속으로 흘러들어가듯
   당신의 마음으로 들어간다.
   바람은 그들만의 상쾌함으로, 폭풍은 그들만의 힘으로
   당신에게 다가간다.
   그러는 동안 당신의 모든 근심과 걱정은
   가을 낙엽처럼 사라져버린다.

                          -존 뮤어의 글 중에서 -
                           (김영주의 『캘리포니아』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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