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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미국

산과 바다와 호수가 있는 길(샌디에고 주변)

by 장돌뱅이. 2012. 5. 3.

우리는 걷는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 중의 하나가 여행이라는 말에 반감을 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아내와 나 역시 여행만큼 꿈과 현실이 감미롭게 만나는 시간을 달리 알지
못한다. 그것은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일 수도 있고, 편안한 휴식일 수도 있으며,
삶을 건 도전과 긴장일 수도 있다.
어떤 유무형의 존재를 확인하거나 사라져 버린 것을 찾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다가오는 시간에 대한 다짐을 하거나 지나간 시간을 반추하는 행위일 수도 있다.

새로운 의미가 내다보이는 창문이기도 하고 익숙한 가치를 씻어내는
맑은 물줄기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로 말하건, 아내와 내게 여행은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의 말처럼 “꿈같은 약속이 가득한 마법의 상자”가 된다.

언제부터인가 아내와 나는 여행만큼이나 걷는 일을 좋아하게 되었다.
한국에 있을 적에는 자주 강변엘 나갔다. 강은 걸어서 5분이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어떤 날은 내가 사는 아파트와 담장을 맞댄 고등학교나 그 너머의 대학 교정을 거닐었다.
미국으로 와서도 변함이 없었다. 늦은 저녁 아파트 단지 내를 가장 많이 걸었던 것 같다.

연애시절처럼 손을 잡거나 팔짱을 낀 채, 검은 하늘에 성긴 별들을 헤아리면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아내와의 산책은 종종 우리가 하루를 마감하는 방식이 되었다.
발끝을 스치는 화단 잔디의 감촉은 부드러웠고 춥지도 덥지도 않아 쾌적한 이곳의 밤 기온은
언제나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사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
목적지로 오고가는 방법을 달리 고민할 필요가 없는, 가까운 곳으로의(에서의) 걷기.
거기에 그저 발걸음을 옮기면 되는,  어떤 의식적인 판단이 필요 없는 본능에 가까운
걷기는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최소한의 것만 필요로 하는 행위일 것이다.
그런 걷기는 우리가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방법이며 동시에 목적이 된다.

천천히 걷는 동안 우리의 의식을 견고하게 조여 왔던 일상의 경계는 자주 느슨해지고,
새로운 생각과 이야기는 그런 경계를 넘어 부드러운 산들바람처럼 자유롭게 피어오르곤 한다.

그것은 우리가 여행에서 기대하는 최고의 것들이었고 그런 여행이 주는 경이로운 기쁨을
느끼기 위해 반드시 ‘좌석에 묶인 채’ 먼 곳으로 가야하는 것은 아니었다.


1. CUYAMACA RANCHO STATE PARK
미국에 와서 피부에 와 닿지 않는 것 중의 하나가 단위이다.
우선 일상생활에 가장 많이 사용 되는 대기 온도를 표시하는 단위 - 즉 화씨(F)가 그랬다.
어느 정도면 시원한 것인지 혹은 더운 것인지 잘 감이 오질 않았다.
온도를 치환하는 공식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알 길이 없어 주위에 물어보자
“그냥 화씨 온도에서 30을 빼고 반으로 나누면 대충 섭씨에 가까워진다” 고 알려주었다.

온도뿐만이 아니다. 길이를 나타내는 단위 중에 인치까지는 좀 익숙하다고 해도
피트, 야드, 마일 등은 들어는 봤어도 감각적으로 그 크기가 쉽게 짐작이 되지는 않았다.
거기에 무게를 나타내는 온스와 파운드, 넓이를 나타내는 에이커 등은 여전히
도량형환산표를 가지고 우리가 쓰는 미터 단위로 환산을 해보고서야 감을 잡는 실정이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만.

CUYAMACA RANCHO 주립공원의 넓이는 26,000 에이커다.
선뜻 감이 오지 않아 환산을 해보니 대략  3천2백만 평(100평방키로미터)가 되었다.
북한산국립공원보다는 크고 지리산국립공원의 4분의 1만한 규모였다.
집에서 동북쪽으로 차로 40분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다.

프리웨이에서 벗어나 곁길로 들어서니 샌디에고에서는 보기 힘든 나무숲과 초록의 산들이
나타난다. 내가 한국에는 있고 샌디에고에는 없는 것 중의 첫 번 째로 북한산을 꼽았더니
누군가 그 대안으로 이곳 CUYAMACA RANCHO 주립공원을 알려주었다.

그의 말대로 그곳에 나무와 숲이 있는 산이었다.
세부적인 모습에선 한국의 산과는 달랐지만 초록이 주는 편안함이 반가웠다.
사막 기후로 건조한 이곳에서는 보기 힘든 산이었다.

그런데 산길로 들어선지 얼마 안 되어 도로 주변에 까맣게 그을린 나무들이 나타났다.
그런 나무들은 산골짜기 메우고 등성이를 타고 넘으며 끝이 보이지 않게 이어졌다.
2003년 10월 경에 이곳에 있었던 엄청나게 큰 화재의 결과였다.
주차장과 주변에 야영장이 있는 PASO PICACHO는 다행스럽게도 불길이 피해간 듯
아름드리 나무들이 초록의 잎을 드리운 채 무성한 숲을 이룬 곳에 있었다.

이곳을 기점으로 일대에서 제일 높다는 CUYAMACA PEAK(6,512 피트)와
STONEWALL PEAK(5730피트)를 두 번에 걸쳐서 올라보았다.

A. CUYAMACA PEAK TRAIL
주차장에 가까이 STONEWALL STORE란 작은 기념품점이 있었다.
뭐가 있나 하고 들어갔더니 흰머리의 후덕한 인상의 노인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은퇴를 하고 자원봉사자로 일한다고 했다. 기아자동차의 미주 지사에서 5년간 근무를
한 적도 있어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 먹었던 갈비와 불고기, 그리고
제주도의 인상을 좋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지도를 공원 지도를 한 장 샀다. 공원에 관해서는 인터넷에 잘 나와 있는데다가,
뚜렷하게 나있는 길을 따라 걷는 산행이므로 굳이 지도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도를 들여다보는 것만큼 즐거운 일 또한 흔치 않다.
나는 길건 짧건 여행 준비의 반은 지도를 들여다보는 것으로 소비한다.  
지도 속에는 상상과 환상의 매력이 스며있기 때문이다.
여행자로서 내가 자동차에 부착하는 네비게이션에 별로 열광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상점 옆으로 작은 소방서가 있었다. 소방서 주변의 숲에서 작업을 하던 여성 소방대원은
정상으로 가는 입구를 묻자 하던 일을 멈추고 나와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드러난 길이므로 더우니 음료수를 충분히 가지고 가라는 충고와 함께.
길은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었다. 걷기에는 편할지 몰라도 산행을 하는 사람에게는
그다지 매력이 없는 것이 포장도로이다. 산 정상에 방송안테나 같은 것이 보였는데
그 시설을 위한 길인 것 같았다.

산길 주변도 온통 새까맣게 불에 탄 나무들로 가득 했다.
미국에서는 인간에 의한 산불이 아니라면 화재도 자연의 일부로 생각하여
인위적인 복원조치를 최소화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어떤 소나무는 솔방울 속에 자신의 씨를 감추고 있다가 산불이 씨주머니의
껍데기를 터뜨려주면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와 뿌리를 내린다고 한다. 그 기다림의
기간이 수십 년을 넘어 때로는 100년 이상도 된다고 하니 자연의 뜻은 정말 오묘하기만
하다. 적어도 100년도 못사는 인간이 함부로 재단할 일이 아닌 것 같다.

많은 것을 일시에 검은 재로 황폐화 시키는 재난 속에서만 싹 틔우는 생명이라니...
앞서간 나무들이 남긴 검은 재들은 어린 새싹들을 키우는 거름이 될 것이다.


*위 사진 : 거대한 숲을 복원하기 위한 자연의 노력은 작은 풀들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CUYAMACA PEAK로 가는 길목에도 그런 소나무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푸른 하늘을 찌르듯 앙상하게 서 있는 나무들의 밑동에는 벌써 작은
야생화들이 야무지게 자신들의 삶을 가꾸고 있었다.
재난의 땅에 번지는 거대한 재활의 숨결인 듯 했다.
“자연은 살아있다.”
어릴 적 극장에서 보았던 다큐멘타리 영화의 제목을 되뇌어 보았다.  


*위 사진 : CUYAMACA PEAK에서의 조망

1시간 반 정도를 걸어서 정상에 올랐다.
땀 흘린 수고로움에 산은 시원스런 전망으로 보답해주었다.
공원으로 서쪽으로 나즈막한 산봉우리들이 삐죽삐죽 고개를 내밀며 섬처럼 떠 있었다.
정상에는 우리 말고 한 동양인과 미국인 청년이 먼저 와 있었다.
그들과 가지고 온 과일을 나누어 먹었다. 잠시 후 그들이 자리를 내주고 간 자리에
앉아 아내와 나는 호쾌한 풍경에 눈을 주었다.
햇살은 강렬했지만 바람은 시원했다.


B. STONEWALL PEAK TRAIL

*위 사진 : 트레일 초입에서 본 STONEWALL 정상. 문자 그대로 정상부가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STONEWALL PEAK는 앞서 올랐던 CUYAMACA PEAK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CUYAMACA PEAK로 오르는 길과 같아 곳곳에 불에 탄 나무들이 서 있긴 했으나
정상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흙길로 되어 있어 걷기에 부드러워서 인지 사람들이
CUYAMACA 보다 많이 찾는 듯 했다. 오르내리는 길에서 어린 아이들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을 만날 수 있었다.  

길은 산허리를 에두르며 완만하게 정상을 향해 나있었다. 오르는 길에 북쪽으로는
CUYAMACA 호수가, 동쪽으로는 ANZA BORREGO DESERT STATE PARK로 이어지는
벌판이 내려다 보였다.


*위 사진 :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 돌아다본 CUYAMACA 호수


*위 사진 : 화강암의 STONEWALL 정상

CUYAMACA PARK는 아내와 나의 산에 대한 갈증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 주었다.
그러나 계곡과 물이 없어 팍팍하기 그지없는 산행이었다.
계곡을 품고 있지 않으니 깊은 맛이 없어 보였다.
산자수명(山紫水明)이라 했던가.
아내와 가벼운 산행에 만족감은 컸지만 산세가 수려하고 물이 맑은
내 나라 아름다운 산들이 그리운 것은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2. TORREY PINES STATE RESERVE

타이거 우즈가 우승한 올 US 오픈 골프경기를 관심 있게 본 사람이라면 TORREY PINES
라는 지명이 귀에 익을 것이다. TORREY PINES STATE RESERVE는 그 골프 경기장
북쪽에 있다. 말 그대로 TORREY PINE을 보존하는 지역이다.

TORREY PINE은 희귀종의 소나무로 지구상에 두 곳, 이곳 골프장 주변 해안과
산타바바라 인근의 섬에만 자생한다고 한다. 한 식물학자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고 하는데,
희귀종이라는 사실을 빼곤 그다지 감동적으로 보이는 나무는 아니었다. 솔잎이 우리
토종 소나무에 비해 길고 비늘형상의 소나무특유의 껍질 문양도 우리처럼 조밀해보이지는
않았다. 우리 나라에서는 소나무가 흔했었기 때문에 내게는 소나무들 사이에서 야생으로
자라는 선인장들에 눈길이 갔다. 봄에는 각종 야생화가 만발한다고 한다.

선인장과 소나무 사이로 난 길 끝에 바다가 떠있다는 사실이 이곳에서 걷는
즐거움을 증폭시킨다. 해안을 따라 형성된 주름진 모양의 절벽지형도 볼만하다.
우리는 예정된 코스를 넘어 해변까지 거기서 다시 먼 길을 돌아 출발지로 돌아왔다.
그리고 주차장에 팔걸이의자를 꺼내 놓고 바닷바람에 땀을 식히며 휴식을 취했다.

운동 뒤에는 허기와 갈증도 행복하게 뒤따라온다.
그래서 찾아 간 곳이 공원 북쪽에 있는 델마 DEL MAR 비치였다.
라호야만큼 부촌으로 알려진 그곳에는 이름난 식당들이 줄 지어 있기 때문이다.


*위 사진 : TORREY PINES RESERVE와 인접한 델마해변과 식당.

JAKE'S는 해변에 접해 있어 음식 맛뿐만 아니라 시원스런 바다 풍경까지 즐길 수
있는 식당이었다. 원하는 시간으로는 예약조차 쉽지 않은 곳이었지만 서비스와
음식의 질에서도 대단한 만족을 주는 곳이었다.


3. BATIQUITOS LAGOON TRAIL

산과 바다가 있는 길을 걸었으니 호수가로 난 길도 걸으면 좋으리라.
꼭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다른 걷기 장소를 찾다보니 알게 된 곳이었다.
호수 하면 잔잔함이 떠오른다.
바닷바람에 실려 오는 파도소리나 오르막 경사를 오르는 가뿐 숨소리도 없는.

BATIQUITOS LAGOON TRAIL이 그런 곳이었다.
가끔씩 호숫가를 따라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지만
선인장과 해안관목 숲 사이로 난 대부분의 길은 텅 비어 있었다.
조용했다. 은빛 비늘에 저녁 햇살을 튕기며 가끔씩 물위로 솟구치는
물고기나 수면을 스칠 듯 비행을 하는 한 떼의 새떼마저 없었다면
움직이는 것조차 하나 없는 정지된 화면 같은 풍경이었을 것이다.

문득 LAKE와 LAGOON의 차이가 궁금해 사전을 찾아보니 LAKE는 그냥 ‘호수나
큰 저수지’이고, LAGOON은 ‘부분적으로 혹은 완전히 바다로부터 분리된 석호(潟湖)’ 라고 나와 있었다.

호수의 북쪽 끝에 FOUR SEASON RESORT가 있는 것은 의외였다.
호수 주변은 주택지라 그런 굴지의 RESORT가 들어설만한 여건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RESORT 안은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특히 아내와 내가 찾아간 VIVACE 라는 이태리 음식점은 손님들로 만석을 이루었다

아내는 이곳에서 먹은 스파게티를 미국에 온 이래 최고의 것으로 평가했다.
솔직히 걷기가 중점인지 걷기를 빙자한 뒤풀이가 주된 목표인지 잘 모르겠다고
아내와 나는 웃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걸었고 세상에 아직도 걸어야할 길이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행복해 질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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