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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미국

깊고 오랜 자이언 ZION 계곡

by 장돌뱅이. 2012. 5. 3.

라스베가스 LAS VEGAS 를 지나며
산모퉁이를 돌자 프리웨이의 저 편 끝으로 거대한 불빛이 떠있다.
마치 어둠의 바다 속에 떠있는 섬처럼 보였다. 라스베가스였다.
불빛은 일대의 하늘을 환하게 물들이며 마치 그곳으로부터 동이 터오는 듯 했다.
새벽 4시. 샌디에고를 떠난지 5시간만이었다.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이던 불빛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갖가지 색상과 모양의 네온사인으로 세밀하게 분화하며 더욱 화려해져 갔다.

잠시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포기했다.
아내가 뒷좌석에서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여행의 시작일 뿐이고 아직 갈 길은 멀었다.
비록 낡은 슬리핑백을 깔고 덮은 채로  웅크리고 자야하는 불편한 잠이지만
조금이라도 더 자두는 것이 다가올 며칠의 여정을 위해 사진 한 장보다
아내에게 유용하리라 생각했다.


*위 사진 : 2007년 말 가족들과 함께 여행하며 찍은 라스베가스의 야경.

15번 프리웨이는 라스베가스 시내를 관통하며 지났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이 낯설지 않았다. 2007년 겨울 아내와 딸아이와 함께 이곳 라스베가스에서 며칠을 보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묵었던 호텔과 우리가 걸었던 거리들이 스치며 지나가는 짧은 순간에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위 사진 : 라스베가스의 한 호텔에서

그곳에서 1센트짜리 슬롯머신의 단추를 누르며 긴장을 과장하고 3백여 미터 고공에서 돌아가는 회전그네를 타며
개구쟁이처럼
즐거워하던 딸아이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여전히 남아 있다가 마치 꿈결인양 감미롭게 차창을 넘어
들어오는 듯 했다.
덕분인지 차안이 한결 훈훈해져 왔다.

"라스베가스를 지났어?"
네온사인 불빛 속을 지나 다시 어둠뿐인 도로로 접어들었을 무렵 아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아내는 고개를 돌려 뒤를 보며 아쉬워했다.
"한 번 보고 싶었는데...우리 딸이랑 묵었던 호텔..."
아내에게도, 나에게도,
또 누구에게도 추억이란 그런 것일 게다.
어떤 장소와 시간에 온기와 생기를
불어넣고 사랑하게 하는. 


자이언 내셔널 파크 ZION NATIONAL PARK
라스베가스에서 계속 15번 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한 시간여를 달려 유타주의 남서쪽의 주요 도시
세인트조지 ST GEORGE에 이르자
동쪽 언덕 위 하늘로부터 동이 터왔다.  
여명 속에 드러나는 붉은 바위
언덕의 생경함이 새삼 이곳이 먼곳임을 일깨워준다.


*위 사진 : 세인트조지에서 맞은 여명

세인트조지를 지나 얼마 되지 않은 허리케인HURRICANE 이라는 곳에서 자이언으로 가는 9번 도로로 접어들었다.
어느 덧 사위가 밝아왔다.
도로 주변의 붉은 바위의 산들이 꼭대기부터 아침 해를 받기 시작했다.  


*위 사진 : 자이언국립공원으로 가는 길목

계기판에 나타난 외부 온도는 샌디에고의 아침보다 훨씬 낮았다.
게다가
움찔움찔 차를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의 소리와 세기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자이언에 도착하기 전 길 옆 주차장에 잠시 차를 세웠다.
좀더 두툼한 옷으로 갈아입어야겠다는 생각에 차문을 열고 내리자 갑작스레 불어닥친 찬 바람이 황급하게 몸을 웅크리게 했다.
"와! 이거 장난이 아닌데."
밤을 새워 달린 시간과 거리는 표준시간만 1시간을  앞당겨 놓은 것이 아니라 기온까지 완벽하게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위 사진 : 자이언 공원 입구 부근

허리케인에서 50분쯤을 달리니 자이언공원 입구가 나왔다.
아내가 준비해 온 샌드위치와 우유로 차안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입가심으로 커피까지 한 잔을 했더니 속이 든든해진다.
대단한 산행길을 앞둔 것처럼 옷차림을 가다듬고 신발끈을 다시 단단히 묶었다. 

제일 먼저 비지터센터를 돌아보았다. 기념으로 작은 컵 하나를 사가지고 나오다
마주친 맞은 편 벤치에서 문득 같은 동호회에 속한 한 회원의 가족이 떠올랐다.
짐작이 맞다면 그들은 지난 여름 자이언 계곡으로 들어가기 전 이곳에서 식사를 했을 것이다.
여행기 속에서 보여주었던 가족들의 단란함, 무엇보다 밤낮이 뒤바뀐
시차에 긴 여행에서도
씩씩함을 잃지 않던  사진 속의 어린 아이들이 인상적이었다.

한 번의 여행이 갑작스럽게 삶의 방식이나 의미를 고양시키는 어떤 극적인 전환점이 될 수는 없을지라도
축적된 작은 기억들이 모이면 훗날 그들에게 삶을 기름지게 하는 
어떤 자양분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어본다.
아내와 내게도 그런 여행이 되기를 바라면서.


*위 사진 : 셔틀버스 안에서 본 자이언 계곡 풍경

자이언공원의 탐방은 셔틀버스를 타는 것으로 시작했다. 개인 차량은 계곡내로 진입이 허락되지 않았다.
대신에 셔틀버스가 이른아침부터 시작하여 늦은 밤까지 10여분 간격으로 ZION CANYON DRIVE를 따라 오간다.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새벽 6시부터 밤 10 -11시까지.)
비지터센터에서 출발하여 계곡의 맨 깊숙한 곳인 TEMPLE OF SINAWAVA까지 여러 곳의 정거장에 선다.
각 정거장마다 내려서 거대하게 솟구친 바위산을 볼 수도 있고 정거장에서 도보로 이어지는 수많은 길을 따라 트렉킹을 할 수도 있다. 

우리는 THE GROTTO와  ZION LODGE, 그리고 COURT OF THE PATRIARCHES의 세 곳에 내려 보았다.
그곳들이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시간 절약을 위해 선택했을 뿐이고 우리가 탔던 셔틀버스 운전수에게 물어서 결정한 것이다.
애초 내가 "어떤 정거장에 내리면 좋겠느냐 "고 묻자
그 운전수는 "모두 다!" 라고 말을 했었다.
시간 때문에 그러니 추천을 해달라고 하자, 그는 매우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한참만에 "개인적"이라는 전제 하에
세 곳을 말해주었던 것이다.


*위 사진 :  이른 아침의 자이언 계곡

실제로 버스를 타고 오가며 내다본 창밖의 풍경은 우열의 구분이 무의미했다.
어느 곳이건 육중한 붉은 바위들이 험준한 산세를 만들고 있었다.
공원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흔한 표현으로 병풍을 둘러친 듯한 수직의 절벽이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이어졌다. 

계곡은 19세기 중반 모르몬교도들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스며들기에 충분할만큼 깊어보였고 외부세계와 단절이 용이해 보였다.
뉴욕주에서 태어난 조지프 스미스2세에 의해 창시된 모르몬교는 비모르몬교와의 교리적인 혹은 사회적인 갈등으로 혹독한 탄압을
받게 되었다. 모르몬교가 법으로 인정한 일부다처제는(1890년에 철폐) 모르몬교 탄압에 좋은 구실이 되기도 했다.
아무튼 박해를 피해 서부로 이동한 교도들은 이곳까지 들어왔고
예사롭지 않은 산세를 보고 이른바 신성한 땅을 의미하는
"ZION"으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셔틀버스 안에서 창문을 통해 내다보거나 혹은 몇몇 정거장에 내려 어슬렁거리며
사진을 찍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이언의 위용을 느낄 수는 있지만 그런 식으로  
자이언과의 만남을 마감하는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캠핑이건 LODGE에서건 계곡 안에서 며칠 밤을 지내며 느긋하게  공원의 이모저모를
심도 있게 살펴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한번의 트렉킹은 해야 했다.


*위 사진 : ZION-MOUNT CAMEL HIGHWAY로 오르는 길

셔틀버스로 계곡을 돌아본 후 우리는 트렉킹을 하기 위해 차를 몰고 9번 도로의 연장인
ZION-MOUNT CAMEL HIGHWAY로 올라갔다. 산허리를 따라 지그재그로 난 '강원도길'을
오르니 정상 가까이에 약 1.8킬로미터 길이의 터널이 있었다. 미국 서부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터널인지라 아내는 반가워하기까지 했다.
끝없이 펼쳐진 평야 지형에 도로를 만들면서 굳이 힘들게 터널을 만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자이언의 터널은 중간중간 옆쪽으로 큰 구멍을 내어 자연 빛으로 터널 내의
조명을 대신하였다. 그러나 통바위를 뚫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던지 길의 폭이
넓지 않았다. 때문에 터널 양쪽에 안내원들이 서서 차량을 교대로 일방통행을 시키고 있었다.


*위 사진 : CANYON OVERLOOK TRAIL의 초입 부분. 오른 쪽 아래로 주차장이 보인다.

우리가 다녀오려는 CANYON OVERLOOK TRAIL은 터널의 동쪽 끝에서 시작하였다.
공원 안내서에 따르면 이 트레일은 길이 1.6키로미터로 왕복 대략 한 시간이 걸리는
난이도 중급 (MODERATE) 의 간단한 코스였다.  끝지점에 "SPECTACULAR VIEWPOINT
OF LOWER ZION CANYON AND PINE CREEK CANYON"이 있다는 말이 우리의 선택 이유가 되었다. 


*위 사진 : 낮이 되면서 기온은 급상승하였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내는 옷을 한여름 모드로 바꾸어야 했다.


그늘이 별로 없는 바위길을 지나 도착한 트레일의 끝에는 안내서의 말대로
산과 계곡이 만드는 장쾌한 풍경을 거느리고 있었다. 절벽은 아스라히 높아서
방금 전 차를 몰고 올라온 급경사의 도로가 작은 리본처럼 보였다. 

1억 4천만년엔 전 북미대륙의 가운데 부분이 바다였다고 하던가.
그때 퇴적된 쌓인 모래가 바위로 변하고 7천만 년 전쯤에는 지각변동으로 솟구쳐  
콜로라도 고원이 된 후 강물에 침식을 당하여 오늘의 자이언이 되었다고 한다.
지질학의 시간은 그 크기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커서 추상적이다. 몇 천만년이니
몇 억년이 하는 시간은 차라리 영원이라고 하는 것이 구체성을 띄는 것 같다.
그 영원의 세월이 빚어낸 작품. 인간은 자연 앞에 좀 더 자세를 낮추어야 한다.
어디 자이언뿐이겠는가.
강가의 널려진 흔한 돌멩이의 내력 앞에서도 인간의 '민쯩'은 무의미해질 것이다.

시인 김지하는 생명의 외연(外延)을 확장시켜 해석했다.구태여 과학적 연구의 성과를
증거로 들며 유기물과 무기물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음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변화하는 모든 것은 영성적 생명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했다.시공간으로 무한한
우주는 이미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이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진동,
순환, 팽창, 생성은 물론 소멸까지도 역동적인 생명현상이라는 것이다.비록 그들이
스스로 복제하여 증식하는 능력이 없거나 그들의 움직임이나 변화의 속도를 인간의
능력으로 감지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한마디로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명이며 동시에 그 자체가 거대한 우주라고 했다.
그의 생각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그곳이 어느 곳이건 세상에 널린 가냘픈 이파리의
풀 한 포기와 쓸모없어 보이는 작은 돌멩이 하나 치우는 것에도 지극히 신중해야 할 근거를 얻게 된다.

아내와 나는 장구한 세월동안 거대하게 뒤척여온 자이언이 내뿜는 싱싱한 생명의
기운에 흠뻑 젖어들기라도 하듯 한동안 바위 위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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