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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미국

아치스공원의 길을 걷듯

by 장돌뱅이. 2012. 5. 4.

브라이스캐년을 나와 아치스 ARCHES 로 향하는 길.
89번 도로를 탔다. 길옆으로 인적이 없는 산들과 사이사이 목장이 스쳐갔다.
노랗게 변해가는 초원과 나뭇잎 사이를 노닐며 풀을 뜯는 말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이 한가롭기 그지없어 보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길과 맑은 하늘, 투명한 햇살과 차안을 가득 채운 음악.
어느 산길에서 차를 세우고 가스레인지를 꺼내 커피를 끓였다.
길옆으로 흐르는 작은 시냇물을 보며 아내와 함께 마시는 인스턴트커피 한 잔.
마음속에선 자꾸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89번 다음의 70번 도로는 인터스테이트 프리웨이로 도로 폭이 훨씬 넓어졌다.
속도 제한도 70마일로 높아졌다. 도로 주변은 목장 같은 목가적인 풍경 대신에
황량한 사막을 보여주고 있었다. 직선으로 뻗어나간 도로의 끝은 저 앞 산허리에
걸린 채 아득해 보였다.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아보지만 그 곳은 끝내 도달하지
못할 신기루처럼 자꾸 물러나기만 했다. 마치 가도 가도 제자리인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브라이스캐년을 떠난 지 5시간 만에 마침내 아치스에 도착했다.


*위 사진 : 아치스공원 입구


아치스 국립공원 ARCHES NATIONAL PARK.
이름 그대로 이 공원에는 무려 2,000개가 넘는 자연적인 아치가 있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길다는 랜드 스케이프 아치 LANDSCAPE ARCH부터  
유타주의 상징물도 쓰이는 저 유명한 '우아한 아치' (DELICATE ARCH)를 비롯하여
TUNNEL ARCH, SKYLINE ARCH, BROKEN ARCH, SAND DUNE ARCH,
DOUBLE ARCH 등 그 모양새와 이름도 다양한 아치들이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 


*위 사진 : DEVILS GARDEN

우리는 공원의 제일 깊숙한 곳에 있는 ‘악마들의 정원’(DEVILS GARDEN)부터 가보기로
했다. 그곳이 꼭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백화점에 가서 구경을 할 때도 먼저 맨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 돌아 내려오는 방법을 선호하는 아내와 나의 단순한 습관 때문이었다.

DEVILS GARDEN 앞 주차장에는 주차 장소를 찾기 힘들 정도로 붐비고 있었다.
이곳을 기점으로 랜드스케이프 아치나 DOUBLE O ARCH 등을 다녀올 수 있는
트레일이 시작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스프라이트님의 여행기에 나오는
사진과 공원 안내서의 표지 사진을 보는 것으로 랜드스케이프 아치를 다녀오는
트레킹을 대신하기로 했다. 많이 보기보다 깊게 보자고 스스로를 달래보았지만
트레킹의 포기가 그런 고상한 철학에 있지 않고 한정된 시간 때문임을 알고 있기에
솔직히 아쉬움은 있었다. 


*위 사진 : 샌드듄아치 가는 길


*위 사진 : FIERY FURNANCE

DEVILS GARDEN을 반환점으로 갔던 길을 되돌아 나오며 샌드듄아치 SAND DUNE ARCH
와 ‘불타는 용광로’ FIERY FURNACE를 들러보았다. 굳이 이름 붙여진 곳을 찾아 들어가지
않고 차도 변에 줄지어 서 있는 기묘한 형상의 바위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치스공원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델리키트 아치 DELICATE ARCH!
실제로 이곳을 다녀가지 않았다 하더라도 누구나 어디선가 한번쯤은 그 사진을 보았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델리키트아치는 그 ‘흔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지닌 아름다움에
전혀 손상을 입지 않을 정도로 우아하고 단정하고 엄정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치스공원이 지닌 아름다움의 최고 정점이었다.


*위 사진 : 델리키트 아치 가는 길

이곳을 다녀오기 위해서 WOLFE RANCH 주차장에서 시작되는 길을 따라 도보로
왕복 두세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그늘 한 점 없는 붉은 바위 언덕을 오르는 다소
힘든 길이었지만 가는 동안에는 가슴 뛰는 설렘으로, 돌아오는 길은 그득한 감동과
만족감으로 지루할 틈이 없는 길이기도 했다.


*위 사진 : 델리키트 아치는 저 절벽 모퉁이를 돌면 나온다.

앞서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여행기를 통해 나는 이 ‘우아한 아치’가 마지막
순간까지 그 모습을 숨기고 있다가 극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마지막 언덕을 넘어 절벽길을 돌아서는 순간 눈앞으로 줌인 되듯이 갑작스레 다가오는
아치의 모습에 가슴 속에서 둔중한 저음의 북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우아한 아치’의 절묘함이 신과 자연이 만들어낸 걸작이라면 그 감동을 극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해 기막힌 연출의 길을 닦은 것은 칭찬 받을만한 인간의 지혜였다.

나는 아치스를 처음 대한 그 자리에 한동안 우뚝 서 있었다.
그것은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아! 그랬구나...”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깨달음 같은 것이 온몸을 감싸며 다가왔다.

머리 위에 흰 눈을 치약처럼 두른 먼 산줄기 쪽으로부터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심마니들은 산삼을 찾는 것이 아니라 만난다고 한다던가. 우리는 언덕 아래 자리를
잡고 ‘우아한 아치’와 마주보며 앉아 마음속으로 인사를 건네기로 했다.
“한국에서 온 장돌뱅이와 모스가 당신을 만나러 왔습니다. 반갑습니다.”


*위 사진 : BALANCED ROCK


*위 사진 : PARADE OF ELEPHANT

‘우아한 아치’를 나와 우리는 윈도우즈 WINDOWS로 갔다.
가는 길목에 촛대 같은 기둥 위로 둥근 바위가 위태롭게 올라앉은 BALANCED ROCK과
GARDEN OF EDEN, PARADE OF ELEPHANT 등을 지났다.
따지고 보면 하나하나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풍경이었지만 ‘우아한 아치’에서
이미 감동의 포만에 이른 터라 비교적 큰 아쉬움이 없이 지나칠 수 있었다.


*위 사진 : WINDOWS 전경


*위 사진 : NORTH WINDOW


*위 사진 : SOUTH WINDOW

윈도우즈는 커다란 절편 같은 수직의 바위에 두 개의 구멍이 ‘창문’처럼 뚫린 형상을
하고 있었다. 두 개의 구멍은 그 위치에 따라 각각 남창 SOUTH WINDOW 과
북창 NORTH WINDOW 이라고 했다. 멀리서보면 창문보다 두 개의 눈처럼 보여 나라면
‘바위의 눈’이나 ‘하늘의 눈’이라 이름 붙였을 것이다.


*위 사진 : 윈도우즈와 마주 하고 있는 ‘포탑 아치’ TURRET ARCH

윈도우즈를 나오자 해가 기울고 있었다.
저녁 햇살은 붉은 바위들을 한층 더 붉은 색으로 물들였다.
공원 초입에 있는 PARK AVENUE TRAIL을 걸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잠시
아내와 고민을 했다. 트레일의 길이가 1.6KM 정도로 길지는 않았지만 원점 회귀형이
아니므로 갔던 길을 되돌아 나와야 했고 그럴 경우 거리와 소요시간이 두 배로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돌아오는 길은 오르막길인데다가 해가 이미 졌으므로 깜깜한 밤길을
걸어할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배낭 속 랜턴의 성능을 확인하고 길로 들어섰다.


*위 사진 : PARK AVENUE TRAIL의 들머리

PARK AVENUE 는 공원 초입에 있는 터라 낮 동안은 차와 인파로 붐비는 곳이나
우리가 트레킹을 시작할 시간에는 주차장이 텅 비어 있었다. 바위 꼭대기에 걸려 있던
저녁 햇살은 우리가 계곡 속으로 들어가면서 이내 사라지고 후미진 곳에서 물러나 있던
어스름이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좀 불안해하던 아내는 들어온 사람만이 볼 수 있는 계곡 내면의 풍경에 매혹되면서
발걸음을 가볍게 옮기기 시작했다. 늦은 시간 덕분에 마치 계곡 전체가 우리만을 위해 열린
양 호젓하기 그지없었다. 아직 푸른빛이 남아 있는 초저녁 하늘엔 노란 반달과 별 몇 개가
돋아나 정겹게 우리를 따라왔다. 우리는 옛 노래를 부르며 걸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투쟁 속에 동지 모아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동지의 손 맞잡고
   가로 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어차 넘어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여차 건너주자
   해 떨어져 어두운 길을 서로 일으켜주고
   가다못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마침내 하나됨을 위하여

생각해보면 어두운 밤길을 걷듯 지치고 힘든 시간마다 아내와 함께 나누며 외롭지 않게 견디어 왔다.
그렇다. 우리가 나눈 시간이 짧지 않거늘 세상이 다시 힘들어졌다한들
두렵고 불안할 게 무엇 있으랴!
시절이 어떻게 다가오던 우린 이제까지처럼 그렇게
앞으로도 걸어갈 것이다. 

트레일 끝에서 우리는 발걸음을 되돌리는 대신 차도로 나섰다.
그리고 아내를 뒤에 세워 놓고 지나가는 차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았다.
벨기에에서 왔다는 노부부가 곧바로 차를 세워 우리를 주차장까지 태워주었다.
두 달 예정으로 미국 서부를 돌아보고 있다고 했다. 그들의 삶과 여행에도
사랑이 가득해 보였다.

공원을 나서며 뒤를 돌아보았다. 공원은 이제 완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자신의 애견과 함께 미국을 여행하며 유명한 여행기 『찰리와 함께 한 여행』을 쓴
소설가 죤스타인벡은 스스로를 “국립공원에 대하여 소홀한 사람”이라고 자인하며 자신은

“실제로 러시모어 산을 보는 것보다 잘 찍어놓은 사진을 보는 쪽이 좋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여행의 목적이 미국(인)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만나보려는 작가적 성실성에
있었다면 자신의 조국이 지닌 자연의 아름다움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갔어도 좋았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국토는 단순히 물리적인 땅덩어리가 아니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늘 정직하게 반영하고 있는 삶의 공간인 것이고, 그의 말대로 “유일무이하게
독특한 것, 또 장관이라는 것, 또는 경악할만한 것”이 있는 국립공원도 그런 국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독특’과 ‘장관’과 ‘경악’에 더하여 깊은 감동도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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