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과 사진/미국

천국의 길, 브라이스캐년 국립공원

by 장돌뱅이. 2012. 5. 3.

브라이스캐년 가는 길
반나절만에 넓고 깊은 자이언국립공원을 돌아보겠다는 계획부터가 사실 무리였다.
그 시간동안 방문 가능한 몇 곳을 남겨두고 그보다 몇곱절 많은 공원의 여러 곳을
가지치기 하듯 제외시킬 때부터 아쉬움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단 한번의 트레킹만으로 자이언의 일정을 마치고 떠나려하니
미진함이나 아쉬움이 예상보다 크게  발걸음을 더디게 했다.
자이언이 주는 매력과 유혹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서둔다고 세상 모두를 볼수 없는 것도 아니고,  또 더 많이 본다고 여행의 의미가
정비례로 업그레이드 되는 것도 아닌 터에 왜 이렇게 늘 여유롭게 계획하지 못하는
것인지 내가 하는 여행 자체가 한심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어쩌랴.
우선은 선불로 지불한 앞길의 숙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이언과 작별해야 했다.  
'다음부터는 좀 다른 형태의 여행으로 이곳에 다시오리라'는
이미 앞서 다녀온 수많은 여행지에 남발한 신빙성 없는 다짐을 남겨두면서.
흔히들 삶과 여행의 동질성을 언급하곤 하지만 두 가지가 지닌 공통점은
내가 계획하면서도 내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데도 있을 것이다.  

브라이스캐년은 자이언에서 북동쪽으로 130길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어 자동차로
두 시간 정도 걸린다. 두 시간이면 서울에서 대전을 가는 만만찮은 거리지만  
미국에서 몇번의 자동차 여행을 해보니 거리에 대한 감각이 후해진다.
대륙이란 그런 것인가 보다.
두 시간 쯤이야 까짓거!

브라이스로 가는 도로변에 가을이 완연했다.
투명한 햇살과 파란 하늘, 노란 나뭇잎들이 차장 밖으로 눈부시게 지나갔다.
아내와 내게 세상의 모든 단풍은 한국의 강원도 곰배령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설악산 대청봉에서 시작된 단풍이 남하하는 소식을 들으며 부산했던
우리들의 주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 우리를 두고 이곳에서 살기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여주기는하지만 아내와 내겐 쉽게 무뎌질 것 같지 않은
내 나라의 기억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추억은 혹은 향수는 우리에게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하는 비탄의 정서가 아니라 생활을 지탱해가는 힘이다.
우리는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이국의 가을 속을 달렸다.

   외로울 때면 생각하세요
   아름다운 이 거리를 생각하세요.
   잊을 수 없는 옛날을 찾아
   난 이렇게 불빛 속을 해멘답니다
   오고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나도 몰래 발길이 멈추는 것은
   지울 수가 없었던 우리들의 모습을
   가슴에 남겨둔 까닭이겠죠
   아-아- 이 거리를 생각하세요.    
             - 장은아의 노래, "이 거리를 생각하세요" -


천국의 길, 브라이스캐년 BRYCE CANYON
동서로는 좁고 남북으로는 긴 형태의 브라이스캐년은 해발 2500미터가 넘는 고지대이다.
그러나 그곳으로 들어가는 길은 그런 높이를 느낄 수 없는 넓은 평원이다.
평원은 향나무와 소나무 전나무로 이루어진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사이로 찻길이 나 있어 좀처럼 계곡의 존재를 짐작 하기 쉽지 않다.
다만 공원 못 미쳐 초입 부분의 - 레드캐년이라 이름 붙여진 - 붉은 바위 기둥들이
숲 속에 예상롭지 않은 절경이 숨어 있음을 암시하는 듯 했다.


*위 사진 : 브라이스캐년 입구 근처에 있는 레드캐년의 붉은 바위

우리는 먼저 차가 갈수 있는 공원의 맨 끝으로 가기로 했다.
그곳에서부터 길을 다라 산재해 있는 여러 전망대를 들러보며 갔던 길을 되돌아나와
마지막으로 브라이스캐년의 절정에 해당된다는 앰피씨어터 지역AMPHITHEATER에서
트레일을 따라 걸을 작정이었다. 가장 맛있는 과자를 가장 나중에 먹으며 그에 대한 기대와
상상을 극대화하여 즐겨보려는 나름의 연출이었다.


*위 사진 : 레인보우 포인트에서의 전망

공원으로 들어갈수록 점차 바람이 심해지고 있었다. 흔들리는 나무 사이로 가끔씩
흙바람이 솓구쳐 올랐다 가라앉곤 했다. 맨 끝에 있는 전망대의 이름은 RAINBOW 였다.
푸른 숲과 붉은 바위가 발 아래에서 어우러져 뻗어나가 시야의 끝에서 파란 하늘과
맞붙어 있었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세 가지의 색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조화가 시워스러웠다.  


*위 사진 : 여러 뷰 포인트에서 본 풍경

브라이스포인트 BRYCE POINT 까지 7-8개의 뷰포인트는 엠피시어터를 빛내기 위한
일종의 소품들로 생각하면 되겠다.  우리보다 더 짧은 시간을 가지고 브라이스캐년을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그러지 말라고 권하고 싶지만) 생략을 해도 크게 아쉬울 것은 없어보였다.  

브라이스포인트는 이 공원 최고의 풍경 중의 하나를 보여주었다.
수천개의 바위들이 일시에 함성을 지르거나 춤을 추는 듯한 화려한 모습으로
곧추 서있었다. 아내는 중국 시안 진시황릉의 병마용들을 생각나게 한다고 했다.


*위 사진 : 브라이스 포인트

전망대의 끝에서는 몸을 지탱하기 힘들 정도로 바람이 불었다.
아내와 나는 철제 난간과 서로의 몸을 번갈아 붙잡아가면서도 계곡에 벌어진
바위들의 잔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당신의 몸무게를 믿어. 절대 날라가지 않아!"
아내의 편안한 관람을 위해 정직한(?) 충고를 해주었지만 아내의 대답은 기습적인
어퍼컷을 나의 하복부에 꽂는 것이었다. 몸무게가 아내의 아킬레스건임을 감동의
풍경 때문에 잠시 망각했던 탓이었다.


*위 사진 : 인스피레이션 포인트

브라이스포인트를 나와 트레일이 시작되는 선셋SUNSET 포인트로 가기 전에 잠시
인스피레이션 INSPIRATION 포인트에 들렸다. 이곳은 다음 날 아침 해돋이를
볼 장소이기에 풍경을 보기보다는 장소를 눈에 익혀두기 위함이었다.


*위 사진 : 선셋 포인트

선셋포인트는 그곳으로부터 지척에 있었다. 어느 덧 햇빛이 사선으로 비춰들고 있었다.
하지만 해지는 시간은 6시 59분까지 계곡을 걸을 시간은 넉넉했다.
우리가 목표로 삼은 트랙킹 코스는 앞서 이곳을 다녀간 스프라이트님의 가족과 동일한
나바호 - 퀸스가든  루프 NAVAHO - QUEENS GARDEN LOOP였다.


*위 사진 : 트레일의 초입

출발점이 된 나바호 트레일은 계곡의 바닥까지 급경사로 내려간다.
스프라이트님 사진에서 보았던 그 길. 드디어 아내와 내가 간다는 흥분에 들떠
우리는 한발 한발 기묘한 붉은 첨탑의 바위들 사이를 돌아 내려갔다.

브라이스 캐년의 바위 하나하나는 바다가 융기하여 생긴 지형을 비와 강물이
깍아내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부드러운 부분이 닳아 없어지고 단단한 바위질만
남은 것이다. 상상할 수 없는 시간동안의 변모의 결과를 우리가 보는 것이고
그 변화는 천천히 그러나 끊임없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인디언들은 이곳의 바위들이 악행으로 신의 저주를 받은 사람들이 변한 모습이라고
믿었다. 아름다운 풍경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무서운 전설이지만  신이 아니고서는
만들어낼 수 없을 듯한  오묘함에대한 인디언들의 경외심의 또 다른 표현일 수도 있으리라.

길은 붉은 바위와 푸른 숲 사이를 지나며 이어졌다.
고개를 들어보면 가파른 절벽 사이로 푸른 하늘이 올려다보였다.
길을 걷는 내내 아내와 나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뿌듯함과 흡족함으로
충만해 있었다. 우리들 뿐만이 아닌 듯했다. 그 길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그득한 만족함의 미소가 서려 있었다.  
천국이 있다면, 그곳을 걷는다면 꼭 그런 모양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우린 그곳을 천국의 길이라 부르기로 했다.

트레일의 종착지인 선라이즈 SUNRISE 포인트는 예상보다 도착할 수 있었다.
중간에 다리를 쉬고 물과 간식을 먹었음에도 2시간이 채 안걸렸다.  
우리는 절벽 위에 앉아 우리가 걸어온 길을 이번에 큰 자부심으로 내려다보았다.

햇살은 점점 더 예각으로 비추고 있었지만 우리는 서둘 필요가 없었다. 숙소가 바로
옆에 있는 브라이스 캐년 롯지 BRYCE CANYON LODGE였기 때문이었다.


*위 사진 : 숙소인 브라이스 캐년 롯지

숲 사이에 지어진 숙소는 깔끔하고 넓었다. 국립공원 안이라는 위치적인 장점이
가격에 반영되어 있었지만 아내도 나도 만족했다.  
저녁을 먹고 맥주 한 캔을 비우자마자 아내는 이내 잠에 빠져 들었다.
실로 강행군의 하루였다.

나는 문을 살짝 닫고 잠시 밖으로 나가 숙소 앞의 숲을 걸어보았다.
텅빈 하늘엔 차오르는지 기우는지 모를 반달이 환하게 떠있었다.
별들은 달빛 속에 숨어 많이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잦아들면서 벌레소리가 또렸해져갔다.

이튿날 새벽 우리는 인스피레이션 포인트로 해맞이를 하러 갔다.
선라이즈포인트보다 그곳이 해맞이에  더 좋다는 글을 인터넷에서 읽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10월 초지만 고지대라 그런지 기온은 매서웠다.
게다가 햇살에 앞서 바람이 먼저 다가와 몸을 움추리게 했다.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발을 동동거린지 오래
마침내 동쪽 하늘에서 빼꼼히 얼굴을 드러낸 해는
삽시간에 공중에 떠올라 세상을 비추기 시작했다.

해넘이의 매력이 비장함이라면 해돋이는 경건함이다.
우리는 누구나 아침의 첫 햇살에 서면 옷깃을 여미며 엄숙해진다.
지나가고 나면 결코 다시 오지 않을 생의 하루를 또 시작하기 때문이다.
시작한다는 것.
비록 어제까지의 매일이 지나고 보면 같은 하루였다고 하더라도
오늘 다시 시작을 생각한다는 것은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감사합니다.'
나는 누구에겐지 모르고, 무엇 때문인지도 모를, 무작정의 감사를 올렸다.
그리고 아침공기에 차거워진 아내의 손을 잡고
잠에서 깨어나는 브라이스캐년의 바위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