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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비에 젖다

by 장돌뱅이. 2021. 6. 4.


어제 한강에서 자전거를 탔다. 비가 올 거라는 예보가 있었고 하늘도 꾸물거리는 상태였지만
한두 시간 안으로는 안 올 것이라는 생각에
무방비로 나갔다가 비를 만났다.
일단 다리 밑으로 들어가 비를 피했다. 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졌다.
조금 더, 조금 더 하고 기다렸지만 비는 쉬이 잦아들 기세가 아니었다.
기다림이 의미가 없어 보였다.

우산을 가지고 마중을 오겠다는 아내의 제안을 거절하고 그냥 빗속으로 나서기로 했다.
지붕이 되어주었던 다리 그림자를 벗어나자 차가운 비가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었다.
그러나 첫 몇 방울이 예민하게 느껴졌을 뿐 이내 감각이 둔해졌다.
몸이 흠뻑 젖게 되면서부터는 시원스러운 쾌감까지 생겨나 오히려 비를 즐기며 페달을 밟을 수 있었다. 
갇혀 있던 다리 아래의 작은 공간에서는 미처 생각치 못한 즐거움이었다.


살면서 예상하지 못한 상황과 갑작스러운 만남은 언제나 조심스럽고 두렵다. 한두 방울 몸에 부딪쳐오기
시작하는 빗방울처럼 새로운 상황 속으로 들어가는 첫걸음은 익숙하지 않은 이물감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일단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 혹은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상황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포기의 심정이어도 좋고 긍정인 마음이어도 좋다. 일단 상황에 푹 담그는 게 문제다.

오래전 내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쳐주신 수녀님께서 믿음에 대해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바닷가에서 처음엔 물에 젖지 않기 위해 뒷걸음을 치거나 조심스러워하지만 일단 온몸을

바다에 내맡겨 푹 적시고 나면 무섭기는커녕 큰 즐거움이 된다고, 더 많이 젖을수록
더 많이 즐거워진다고, 그게 신에 대한 믿음이고 신이 주는 은총이라고 하셨다.

삶의 행복은 물론이겠지만 불행도 그와 같을까?
절실한 기도와 온전한 내맡김을 생각하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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