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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가난의 문법』

by 장돌뱅이. 2021. 5. 26.



『가난의 문법』은  도시의 골목에서 재활용품을 수집해서 파는 (여성) 노인에 관한 책이다. 
책은 숫자와 통계를 바탕으로 그들에 대한 건조한 해석을 하는 대신, 가상의 인물인  '윤영자'의
일상을 통해 그들의 노동과 살아온 내력, 그리고 가난에 관해 밀착된 설명을 제공한다.

1945년생인 '윤영자'는 그해 출생 등록을 한 이름 가운데 가장 많은  이름이라고 한다.   
소설(영화)『82년생 김지영』이 그랬던 것처럼 '45년생 윤영자'에게 그 세대의
평균적 여성이란 의미를 부여하려는 저자의 의도겠다.

1945년생은 2020년을 기준으로 76세(만 75세)이다.
이 세대는 한국전쟁의 생존자로 권위주의 개발 국가의 청년 혹은 중년이었고, 1997년 외환위기,
2007년 세계 금융위기 속에서 노인이 된 사람들로 그들의 생애경로는 현대사의 거친 굴곡의
한복판에서 이어졌다. 게다가 (1980년대 말 적용된) 사회보험(특히 국민연금)을 비롯한
사회 보장제도가 안착되기 전에 이미 노령기에 접어들어 물질적 부를 축적하지 못한 이들은
마땅한 생계의 수단이 상대적으로 매우 부족하다는 특이점을 지닌 인구집단이다.

안타깝게도 '윤영자' 세대의 빈곤은 심각하다.
65세 이상의 경우 한국의 상대적 빈곤율은 43.8%로 OECD 가입 국가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다.
여기에 65세∼79세 사이 인구의 고용률은 40.4%에 달한다.
즉 제도적 은퇴 나이를 지나서도 쉬지 못하고 일을 많이 하는데도 빈곤하다는 뜻이다.
게다가 대부분은 질이 낮은 일자리에서 노동을 하고 있다.
'윤영자' 세대에게 '재활용품 수집'이란 일은 선택이라기보다는 내몰림이다.

'재활용품 수집'은 주인 없는 물건을 먼저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속도경쟁이 치열한 생태계다.
따라서 신체적 능력이 남성에 비해 약한 '윤영자' 같은 여성들에게는 더욱 힘겨운 노동이 된다.
덩치 큰 리어카를 끌 수 있는 남자들과 카트를 끌며 경쟁해야 하는 '윤영자'는 장비에서부터 밀릴 수밖에 없다.
여성 노인들에게 남성 노인들은 , 남성 노인들에게 젊은 청·장년층은 일종의 '상위 포식자'이다.

여성 노인들은 재활용품을 수집하면서도 가사노동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생의 목표를 남편에 대한 내조와 자녀의 양육으로 삼게 하고,  교육을 받고 직업을 가질 기회를
갖지 못하게 했던 여성에 대한 사회·문화적 강요는 노인이 된 여성들에게도 여전한 것이다.

강도 높은 노동에 비해 재활용품 수집으로 '윤영자'들이 버는 소득은 너무 적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한 달에 57만 원 정도로 추정된다.
그나마 해마다 재활용품 판매 가격이 저하되고 있는 실정이다. 
재활용품 수집 노인의 가구소득은 73만 원으로 2017년 2인 가구 최저 생계비 수준이 84만 원에 못 미친다.

가난은 하나의 현상으로 이를 둘러싼 여러 구조가 존재한다.
그리고 개인과 가족의 필연적이거나 우연한 선택이 존재했으며 이로 인해 이행되어온 경로가 있다. 
거대한 격동의 시간만 다루는 한 국가의 정치사와 경제사도 물론 그렇지만,
국가 및 사회와 간접적 영향을 주고받는 사람들의 생애 역시 지금의 역사다.
그들의 삶 속에서 국가와 사회는 끊임없이 유동하며 대응해야 할 사건들을 만들어내는 대상이었을 것이다.
개인은 감당 가능한 생존의 전술과 전략을 스스로 만들어 내야 했던 것이다. 
어떤 선택이 삶을 질곡으로 몰아갔 건 그것을 '윤영자'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는 없는 이유다.
'윤영자'의 현재는 사회 구조의 불완전하고 미비한 부분이 만들어낸 결과물이기도 한 것이다. 

동정과 시혜, 자선과 기부는 그런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정당화하고 고착화시킬 뿐이다.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윤영자'들과 지역사회가 상호의존하는 계기들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근근이 벌어 생계를 유지하는 '나홀로' 자립보다, 함께 모여 서로에게 의존하는 자립이 필요하다.
사회와 마을, 이웃에 의존하는 것을 죄악시하는 의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이상『가난의 문법』에서 발췌와 정리, 그리고 일부 내용 추가한 것임)


가난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말할 때 나는 늘 학창 시절에 읽었던 서인석의 글을 떠올린다.

만일 우리 사회가 <가난한 자들의 권리>를 인정하고 최우선으로 보호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법이 없는 사회가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사회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수조건인 바 <공정한 법>은 그 사회의 정의가 보장받을 수 있는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이다. 폭력·이익의 절제 없는 추구, 배금주의와 경제적 착취는 정치적 억압을
낳고 드디어는 법을 무기력하게 만들 것이다.

만일 우리 사회가 <가난한 자들의 외침>을 억압한다면 우리 사회는 <예언자들이 없는 사회>가 될 것이다.
예언자의 목소리가 침묵하는 사회는 온갖 죄악과 사회불의에도 불구하고, 편안히 잠든 양심을 일깨울
<불침번>이 없는 사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 사회는 폭력과 이기주의의 <암흑> 속에서 헤매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의 사회가 <가난한 자들의 기쁨>을 빼앗는다면, 우리 사회는 자기에게 고유한 <역사의 새로운 장>을
쓰는 데 무능한 사회가 될 것이다. 기쁨이 없는 곳에 그 누구도 좀 더 나은 미래, <새 하늘 · 새 땅>의
<신세계> 에로 시선을 돌리지 않고, 또한 기쁨이 없는 사회는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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