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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이주 노동자 관련한 영화 몇 편

by 장돌뱅이. 2021. 6. 22.

지구촌이니 글로벌이니 세계화니 하는 말들이 들린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세상은 말처럼 가까워진 것 같지 않다. 
가까워지기는커녕 국가와 국가, 계층과 계층, 사람과 사람 간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것 같다.
많은 나라에서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반 이민 정서와 정책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이민자를 내쫓고 난민을 거부하여 자신들만의 국가로 되돌리자는 극단적인 주장도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압축된 정치·경제적 발전, 이주노동자들의 증가. 주변 국가들과  교류와 분쟁 확대에
내적으로 식민지 유제 미청산, 분단 등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극우 세력의 목소리가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몇 편의 영화를 보며 그 속에 우리의 모습을 비춰본다.


1. 『콜래트럴 이펙트』


영국 TV 드라마 『Collateral』은 무슨 뜻일까?
단순히 ‘부가적인’이라거나 ‘additional but subordinate’ 라는 사전 상의 설명으론 드라마의 내용과 연결 짓기가 어렵다. 
“Collateral Damage”라고 하면 ‘부가적 피해'에 ‘무고한 피해’라는 의미도 있으니 ‘무고한’이라고 생각해도 될까?
한국 넷플릭스에서  제목에 "Effect”를 추가하여 '콜래트럴 이펙트'라고했어도 모호하긴 마찬가지다.
 두말할 것 없이 나의 ‘깨진(broken) 영어' 실력 탓이다. 


아무튼 『Collateral』은 한 피자 배달부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배달에서 돌아오는 길에 누군가가 쏜 총에 맞은 것이다.
담당 형사 킵의 차분하고 집요한 수사 과정에서 사건과 관련된 일들과 배경이 드러난다.
본국에서 쫓겨온 무슬림, 미등록이주민('불법체류자'), 편협한 애국심으로 무장된 군인과 정보국 요원,
갈등을 조장하는 언론과 정치인, 마약 거래상, 밀수업자, 동성애자, 성희롱과 성폭행 등등.

이야기의 구성이 조금은 산만했던『Collateral』은  살인범을 밝혀내는 과정을 통하여  다양한 삶의 모습을
'부수적으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누구나 자신의  삶은 절박한 중심이고 근본이지 결코 '부수적'일 수 없다.
편견과 차별의 울타리 속에 다른 사람들의 '무고한' 삶을 가두려 할 때 세상은 고통스러워질 뿐이다.


2. 『디스 이즈 잉글랜드』

 
1980년대 영국은 대처 수상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실업자가 양산되고 물가와 집세가 치솟았다.
생존을 위한 치열한 경쟁이 일상화 되면서 사람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12살의 귀여운  소년 숀은 포클랜드전쟁에서 아빠를 잃고 우울하고 무료하게 하루를 지낸다.
친구에게 놀림을 받으며 학교를 마치면 혼자 공원에서 새총이나 쏘는 것이 생활의 전부다.
그러다 동네 건달 무리와 어울리게 된다. 그들은 한껏 멋을 부리고 머리를 빡빡 민  어설픈 스킨헤드들이다.
사실 스킨헤드가 무엇인지도 잘 모른다. 그냥 자신들끼리 즐겁게 몰려다닐 뿐이다.

그러나 감옥에서 3년만에 출소한 콤보가  가담하면서 점차 분위기는 달라진다. 
콤보는 자신들의 실업과 가난이 영국에 들어와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은 'Fucking Paki(파키스탄 이민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영국인들끼리 뭉쳐서 이주노동자와 난민들을 내쫓고 순수한 영국인이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극우주의자의 '애국적' 연설에 감동한다.
그리고 온 동네 벽에다가 파키스탄인을 욕하는 낙서를 하고, 만나는 파키스탄인들에게 물리적 폭력을 행사한다.
파키스탄인이 운영하는 가게에 들어가 난장판을 만들고 거리낌 없이 물건을 털기도 한다.
경쟁에서 밀려난  패배감과 무기력에서 비롯된 분노를  사회적 약자들에게 거칠게 표출하는 것이다.  

21세기의 영국은 어떤 모습일까?  그때완 많이 달라졌을까?
숀과 콤보는 우리에게 어떤 타산지석의 교훈이 될 수 있을까? 


3. 『자유로운 세계』


인력 파견 회사에서 일하던 엔지는 상사의 성희롱에 반항을 했다. 결과는 해고였다.

계약직이다 보니 해고의 효력을 다툴 수 있는 별다른 권리가 있을 수 없다. 
부모에게 아이를 맡긴 싱글맘 엔지는 생활을 위해 친구와 함께 자신의 사업을 시작한다.
전직 회사의 근무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인력 파견 사업이다.

사업자로서 엔지는 더 많은 이윤을 낼 수 있는 미등록 이주노동자 ('불법체류자')의 불법 거래에 점차 관심을 갖게 되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복지는커녕 그들의 약점을 이용해 싼값에 마음대로 부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최저임금은 주느냐는 물음에 엔지는  "그들은 고향에서 굶주리던 사람들이에요"라고 답을 하게 되었다.
굶주리던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밥이라도 먹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좋은 일이 아니냐는 뜻이었다.

'서는 곳이 바뀌면 풍경이 달라진다'라고 했던가?
계약직 노동자가 아닌 사업자로서 엔지가 바라보는 세상의 풍경은 달랐던 것이다.

마침내 앤지는 이주 노동자들에게 주어야 할 돈을 가로채기까지 한다.
망설이는 동료에게 앤지는 냉소적인 답을 건넨다.
"돈을 주고 싶으면, 네 몫에서 줘. 여긴 자유로운 세계이니까"

자본만이 '자유로운 세상'에서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설 자리가 없다., 
경쟁력 강화, 경영 합리화,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의 화려한 말로 포장된 논리들은 노동자를 정규직과 비정규직,
이주노동자와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가격'으로 분화시켰을 뿐이다.

엔지는 점점 더 '자유로운 세상'의 어둠 속으로 내몰리듯 빠져든다. 


4.『7월 22일』


현실은 자주 상상을 앞서간다. 이 영화는 끔찍하게도 실화이다.
2011년 7월 22일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 정부 청사에서 차량에 실린 폭탄이 터졌다.
8명이 죽고 7명의 중상자를 포함 15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범인은 32살의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였다.
그는 몇 시간 뒤 경찰로 위장을 하고 오슬로에서 멀지 않은 우퇴위아섬으로 갔다.
그곳에서 청소년 캠프에 참가하고 있던 어린 학생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기를 난사하여 69명을 죽였다.
다문화를 수용하려는 미래의 지도자를 없애기 위한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노르웨이 경찰은 브레이비크가 극우주의자이자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발표했다.
브레이비크는 범행 전 다문화주의를 비판하는 장문의 ‘2083:유럽 독립선언문’을 인터넷에 게시했다.
선언문은 2083년까지 유럽 각국이 극우 보수 정권으로 정권교체를 이루고 무슬림 이민자를 내쫓고 기독교 문화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브레이비크는 스스로를 ‘성전 기사단’의 지휘관으로 칭하며 재판에서 나치식 경례를 하기도 했다.

그는 정신감정을 통하여 처벌을 낮추려는 변호사의 제안을 거부했다.
자신의 행위는 난민과 다문화에서 벗어난 ‘순수’ 유럽을 만들기 위한 이성적이고 신념적인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노르웨이 법정은 2012년 8월 그에게 최고형인 ‘징역 21년’을 선고한다.
영화는 끔찍한 범죄를 생생히 묘사하는 동시에 상처를 치유해나가는 노르웨인들의 노력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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