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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완벽한 타인』의 『빈집』

by 장돌뱅이. 2021. 8. 31.



영화『완벽한 타인』은 죽마고우들이 부부 동반으로 한 자리에 모여 저녁을 먹는 것으로 시작된다.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누군가 한 가지 제안을 한다.
'각자의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통화 내용부터 문자와 이메일까지 모두 공개하자'는 것.
모두들 재미있는 놀이처럼 찬성을 한다(이럴 때 반대하는 건 오해를 불러올 수 있는 일이다).

휴대폰 공개는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저마다 감추어져 있던 삶의 이면을 가감 없이 드러내기 시작한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쏟아져 나온 서로에 대한 험담, 외도, 차별, 가족 간 무시, 갈등, 성 정체성 등은 이제까지
더없이 다정했던, 공개되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그러했을, 친구와 가족, 그리고 부부간의 관계를 마구 휘저어 놓는다.
또 다른 자신이라고 믿었던 배우자며 친구가 속내를 알 수 없는 '완벽한 타인'으로 낯설어지는 것이다.

영화는 사람에겐 '공적인 삶, 사적인 삶, 비밀의 삶'의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참된 부부나 친구가  되기 위해 그 세 가지 모두, 특히 비밀스러운 영역까지 속속들이 나누어야 할까?
어떤 사실이, 특히 그것이 단지 공개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알고 있는 사실보다 더 순도 높은 진실이라고 믿어야 할까?  
영화는 그 '비밀'에 험담과 불륜 같은 부정적인 것만 담고 있지만, 드러나지 않아서 아름다운 것도 있지 않을까?

"우리도 한 번 휴대폰을 공개해 볼까?"
영화를 보고 아내와 이런저런 질문과 농담을 반복하다 오래전에 읽은 김인숙의 단편소설 『빈집』에 다다랐다.

소설 속 쉰다섯 살의 중년 여자는 남편과 이십칠 년을 살았다.
그녀는  남편이 '쫌팽이' 과에 속한다고 생각하여 탐탁지 않게 여긴다.  남편은 술도 담배도 안 하고
화투판에 끼어들 지도 않는다. 돈을 크게 벌 줄도 쓸 줄도 모른다. 남편은 집에 있으면 텔레비전 리모컨만 둘려댄다.
취미도 변변한 친구도 없다. 대머리에 근육질인 오십 대인 남편은 낡은 점퍼를 입고 이삿짐과 화물 운송이란 육체노동을 한다.
고객의 대부분이 젊고 어린 여자애들인데, 남편은 그야말로 친절하고, 친절하다기보다는 공손하고,
공손하다기보다는 때때로 비굴하게 보일 정도이기까지 하다.

독서가 취미인 그녀는 추리소설에서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평범한 남편이 사실은 연쇄살인범이라는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되는 아내의 이야기를 읽으며 자신의 남편과 비교하기도 한다.
그녀는 남편에게서 비밀을 발견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물론 자신의 남편이 소설 속의 남편처럼
연쇄살인범이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남자가 말이야. 남자라면 말이지······ 하다못해
양말 속에 숨겨 놓은 비상금 정도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라고 트집을 잡아보기도 한다.

남편이 일 때문에 집을 비운 어느 날 저녁, 그녀는  아파트 쓰레기장 옆에 주차된, 남편의 작은 용달차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한 트럭의 화물칸에 앉아, 집으로 돌아오는 자동차 불빛들을 바라보며
쓰레기라 해도 무방할 낡은 점퍼를 입고 짐을 나르는 대머리의 늙은 남편을 떠올린다.
그리고 문득 그녀 역시 남편을 경멸할 뿐만이 아니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가슴이 먹먹해진다.
'사랑이 별것이겠는가. 누군가를 하루도 빠짐없이 기다린다면, 그 기다림이 안타깝고 애절하지 않다고 해도,
이십칠 년의 그날들은 사랑인 것이다.'

그 시각 남편은 '빈집'에 있다. 몇 해 전 친척이 세상을 뜨며 물려준 시골 폐가다. 그녀도 '빈집'의 존재를
알고 있지만 그곳에서 남편이 하는 일은 알지 못한다. 아니 어떤 일을 한다는 사실 자체를 상상하지 못한다. 
남편은 '빈집'에 들어설 때마다 '마치 전기가 들어오는 것처럼 , 몸속의 모든 핏줄과 힘줄에서 반짝하고
불이 켜지는 것처럼' 기쁨을 느낀다. 그곳에는 일상에서 사라지거나 용도가 무의미해진, 실제라기
보다는 상상에 가까운 개와 열쇠들이 있다. 그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비밀이 키우는 그의 세계와 공간엔 '물에 만 밥' 같은 일상을 깨우는 사랑도 있다.
'그는 곧 다시 돌아갈 것이고, 돌아가서는 묵묵히 아내의 모든 상처를 치료해줄 것'이다.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서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다고 해서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니'다. 


사람의 관계는 이해나 믿음으로 고리 지어지는 아니라 사랑으로 연결된다.
'인간관계의 가장 압축된 상징'인 부부 사이에서는 더욱 그렇다.
어떤 관계에서든 서로에게 완전히 다가설 수 없는 거리가 있다. 거기부터가 상대방의 '빈집'이다.

이해할 수 없고 때론 믿기 힘든 낯선 울타리, 쓸쓸하고 고독해지는 경계이기도 하지만 사랑은 그곳에서
시작된다고(되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휴대폰 속 켕기는(?) 게 많은 자의 변명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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