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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너무나 많은 행복」

by 장돌뱅이. 2021. 9. 5.

옆에 누운  손자가 뒤척였다. 잠을 깨는 기척이다.
나는 얼른 자는 척을 하며 실눈을 뜨고 손자가 하는 양을 살폈다.
눈을 비비고 일어난 손자는 잠시 정신을 차리고 나를 살피더니 뭔가 생각났다는 듯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코를 잡아 흔들었다.
어제 밤 잠들기 전에 먼저 일어나는 사람이 그렇게 하기로 약속을 한 터였다.
내가 깜짝 놀라는 시늉을 지으며 일어나자 깔깔깔 침대 위를 구른다.

 


아침을 먹고 마술놀이와 규칙이 손자 임의대로 바뀌는 정체불명의(?) 마녀놀이를 했다.
둘이서 마녀가 되어 다른 사람에게 '간지럼 독'을 퍼트려 웃게 만들었다. 
아파트 관리실에서 마련한 화분에 상추와 치커리 모종도 심어 보았다.
일정한 간격으로 작은 구멍을 만들고 모종을 끼워넣는 단순 작업이었지만 손자는 진지한 호기심을 보였다.
채소가 커지면 고기를 구워 먹자고 약속을 했다.

손자가 강추하는 바다 속 동물 탐험대원의 활약을  그린 애니메이션 "옥토넛"을 함께 보았다.
나는 처음엔 재미있어 해야 했지만 오래 보다보니 실제로 재미있어지기도 했다.
점심으로 준비해온 재료로 파인애플 볶음밥을 만들어 손자의 품평을 들었다. 합격이었다.
손자는 음식에 대한 평가에 단호하다. 한 번 엄지 손가락을 아래로 향하는 재료는 상에 다시는 오를 수 없다.
오이나 버섯, 고사리, 호두 등이 그렇다.

 

 


오후엔 자전거를 타고 주변 산책길을 달리다 놀이터에서 만난 친구들과 어울렸다.
숨바꼭질과 얼음땡, 원반던지기 놀이에 모두들 땀을 흘렸다. 가끔 사소한 문제로 목청을 높이기도 했다.
손자는 '할아버지 전담 술래 상시 대기'라는 미끼로 친구들을 모으곤 한다.  

어린이 축구교실에서 공을 따라 송사리 떼처럼 몰려다니는 손자와 또래들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저녁을 먹고 딸아이네와 집 주변 호수로 산책을 나갔다.
하루종일 뛰어놀고도 손자는 지친 기색 없이 가뿐해 보였다.
걷기에 더없이 쾌적한 날씨였다. 고층아파트의 불빛이 수면에 어른거리는 풍경도 산뜻했다.
돌아오는 길에 손자가 다리가 아프다고 하여 등을 빌려주었다.
등과 손에 느껴지는 손자의 살이 보드랍고 살갑기 그지없다.
잠자리에 들기 전 손자는 나의 손등에 '최고야'라는 글씨가 쓰인 스티커를 붙여주었다.
오늘 하루 대단히 만족했으며 당신은 합격이라는 의미다.  


행복이 너무나 많아서 겁이 난다
사랑하는 동안
행복이 폭설처럼 쏟아져서 겁이 난다

강둑이 무너지고
물길이 하늘 끝에 닿은 홍수 속에서도
우리만 햇빛을 얻어 겁이 난다

겉으로 보아서는
아무것도 없는 너와 난데
사랑하는 동안에는
행복이 너무 많이 겁이 난다

- 이생진, 「너무나 많은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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