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과 사진/한국

제주행1 - 나의 첫 올레길

by 장돌뱅이. 2012. 5. 8.

성산 가는 길

*위 사진 : 연북정

조천 바닷가 축대 위에 연북정(戀北亭)이 있다. 그 옛날 제주로 파견된 관리나 권력 다툼에 밀려난 유배인들이 떠나온 곳과 자신을 내친 권력에 대한 충정과 사랑이 아직 변치 않았음을 시위하던(?) 장소라고 한다. ‘북에서 온’ 그들에게 제주는 어떤 곳이었을까? 변방에 버려진 처지지만 끝내 뼈를 묻고 싶지는 않은 곳? 아름답기는 하지만 척박한 곳? 한양에서 새로운 소식만 뜨면 곧바로 떠나야 할 곳이었을까?. 그래서 수많은 관리들이 이 섬에만 오면 그렇게 유난스러운 폭정으로 백성들을 수탈했던 것일까?

제주도를 “삶과 자연이 한 뭉수리로 얽힌” 현장으로 인식하고자 할 때 중요한 것은 연북정의 ‘북쪽 사람’들이 묻는 제주의 의미가 아니라 제주도와 그 속에서 살아온 제주 사람들이 묻는 ‘북’의 의미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제주를 위한 것만이 아닌 ‘북’을 위한 것이기도 하며 우리 모두가 살아온 시간을 객관화하는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조천에서 함덕까지 큰길에서 벗어나 바다 쪽 작은 길로 차를 몰았다. 제주의 겨울 바다를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바다는 시리도록 짙푸름 속에 연초록의 투명함이 현란하게 어우러진 채로 출렁이고 있었다. 그 색감은 거센 바람을 잊고 풍덩 뛰어들고 싶을 만큼 유혹적이었다.

"와! 동남아 바다 같아!”
해변에 서서 환성을 지르다가 나의 일천한 경험에 빚댄 그런 식의 표현에 스스로 열쩍어졌다.
그동안 제주와 제주바다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함의 결과라는 생각에서였다.

올레길 - 제주도의 아름다운 속살을 걷는 길

*위 사진 : 올레길 1코스 지도(제주올레 홈페이지에서 인용)

성산 일출봉이 건너다 보이는 숙소에 짐을 풀고 올레길을 걷기 위해 나섰다.
원래는 이튿날 걸을 예정이었으나 비가 온다는 소식에 하루를 앞당기기로 했다.

서명숙이라는 제주 출신의 한 언론인의 발의와 노력으로 만들어진 올레길은 짧은 시간에 제주의 '명품'으로 자리 잡은 느낌이다. 올레길이 만들어진 동기와 과정을 적은 책 『놀멍 쉬멍 걸으멍』 속에 보이는 그녀의 제주사랑이 밝고 유쾌하고 당당하다. 올레란 말은 제주도 사투리로 큰길에서 대문으로 이어지는 작은 골목길을 뜻한다고 한다.

이번 여행에서는 올레 1코스만 걷기로 했다. 지금까지 열린 11코스 모두를 걸어보고 싶다는 욕심은 한정된 시간에 비추어볼 때 욕심일 뿐이었다. 모든 코스는커녕 늦은 오후의 출발이라 1코스도 다 걸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어차피 올레길의 정신은 숙제처럼 해치우거나 마라톤처럼 반드시 완주를 해야 할 의무가 없는 유유자적의 홀가분함에 있을 것이다. 욕심을 버리고 가는 데까지 가리라는 편한 마음으로 길을 걸었다.

시흥초등학교 옆에 차를 세우고 돌담길 사이를 걷기 시작했다. 밭을 둘러싸고 있는 제주도의 돌담은 소유의 경계에 앞서 바람을 막아 곡식을 키우기 위한 방책이다. 한 줄로 쌓아 올린 담은 구멍이 숭숭한 채로 금방 넘어질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손으로 밀어도 끄떡없을 만큼 튼튼하다. 누군가 구멍이 없으면 태풍을 견딜 수 없을 것이라 했다. 바람을 보내며 바람을 이긴다고 생각하니 어떤 깊은 공학적이고 철학적 의미가 스며 있는 것 같다.

밭이 끝나는 곳에서 돌담길을 벗어나며 말미오름이 시작되었다.
능선에 오르자 시야가 확 트이며 시원스러운 전망이 나타난다.

초록의 들판은 솜씨 좋은 바느질 자국 같은 돌담으로 가지런히 나뉘어 있다. 그 곁 올망졸망 정겨운 마을의 집들 너머론 푸른색의 호쾌한 수평선이 우도와 성산 일출봉을 잇고 있었다.

말미오름과 이어지는 알오름은 말을 방목하는 목장이었다. 말똥이 널려 있는 언덕길을 오르니 아래쪽으로 어딘가로 걸어가는 서너 마리의 말무리가 보였다.

알오름 정상에서 딸아이는 팔을 벌린 채 양껏 바람을 안으며 심호흡을 했다. 바람처럼 자유롭게 보였다.

오름을 내려오니 길은 해안마을 종달리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종다리와 관련이 있는 순한글 이름일까 해서 나중에 알아봤더니 한자로 종달리(終達里)로 쓴다고 했다.

마을로 들어서 갈대밭 사이로 난 길을 지나자 바다를 끼고 걷는 해안도로가 나왔다.

멀리 바다 한쪽 끝으로 일출봉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3분의 2쯤 온 것 같은데 늦게 출발한 탓에 날이 어둑해져 오고 있었다. 우리는 성산 갑문을 넘지 못하고 걷기를 멈추었다. 어둠에 풍경이 사라진 올레길을 굳이 강행군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이미 걸어온 길 만으로 흡족하기도 했다.

 첫 번째 올레길에서 본 제주의 바다와 땅과 하늘은, 그리고 마을은 완벽한 구도로 존재하고 있었다.
좀 경박스러운 표현이긴 하지만 제주가 지닌 자연의 아름다움을 '종합선물세트'처럼 담아내는 길이었다.
숨소리가 거칠어지지 않는 편안한 길이어서 사색하기에도 좋은 길이었다.
새롭게 떠오르는 생각이란 원래 거기 있던 풍경에서 나오는 것이란 말에 나는 긍정한다.
아름다운 곳에선 아름다운 생각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아내와 딸의 웃음소리가 마음을 그득하게 채웠다. 

(2009년 1월)

'여행과 사진 > 한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충주 월악산  (2) 2012.05.08
제주행2 - 작아지는 섭지코지  (4) 2012.05.08
연두빛 마곡사  (2) 2012.04.20
춘향(春香) 그리고 광한루.  (0) 2012.04.20
월드컵공원의 행복한 기억과 산책  (0) 2012.04.2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