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종 때 기묘사화로 제주로 유배되었던 충암 김정(金淨)은 제주 날씨에 대해 글을 남겼다.
"기후는 겨울철에도 때로는 덥고 여름에도 때론 서늘하여 변덕스럽고, 바람은 따뜻한 듯하면서도
사람의 옷 속으로 파고드는 품이 몹시도 날카롭다. 의복과 음식도 조절하기가 어려워 병이 나기 쉽다.
더군다나 구름과 안개가 항상 덮여 있어 갠 날이 적으며, 맹풍(盲風)과 궂은비가 때를 가리지 않고
일어나곤 해서 무덥고 축축하고 끈끈하며 담담하다."
김정이 경험한 제주의 날씨는 변화무쌍하고 고약스러워 보인다.
한 친구는 내가 제주도에 간다고 하자 '태풍이 없길 바란다'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태풍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곳이다 보니 태풍만 발생하면 제주가 날씨 뉴스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의 날씨 운은 정말 좋았다. 3주가 지나도록 비는 거의 오지 않았고 어쩌다 오더라도
새벽녘에 잠깐 내리고 마는 정도였다. 그리고는 이내 맑아져 계획한 일정을 실행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대신에 한여름 같은 더위가 9월에서 10월로 이어졌다. 근래에 없는 이상고온이라고 했다.
가을 날씨를 대비하여 가져온 소매가 긴 옷은 옷장 속에 묵혀두어야 했다.
뉴스를 보면 오히려 서울을 비롯한 중부 지역에 비가 자주 왔다.
친구들은 무슨 가을장마가 이리도 기냐고 투덜거렸다.
나는 제주의 맑은 하늘을 찍어 카톡에 올리며 서울에 거주하는 '불우이웃'들을 약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12일)은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여 오후까지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번 여행 중 처음이었다. 서귀포 시내로 나가 볼까 하다가 마음을 바꾸어 그냥 집에서 쉬기로 했다.
비 때문에 창밖은 우중충했지만 실내는 더 오붓해졌다.
"그래, 비 오는 날은 역시 봉다리커피야."
음악을 들으며 달달한 봉다리커피를 마셨다.
커피 전문가가 흔한 세상인지라 우리 입맛에 동의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하더라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그렇다는데 뭐?'
아내와 둘만의 이유 없는 결기를 세우기도 하며 낄낄거리다, 맛난 것을 만들어 비 오는 날 특유의 궁금해진 입을 달래기로 했다.
멸치와 냉장고 속의 남은 채소를 넣어 육수를 내고 메밀가루로 반죽을 하였다.
그리고 육수에 고추장을 풀어 수제비를 만들었다.
주인집에서 준 노란 호박을 썰어 넣었더니 맛이 더 깊어진 느낌이었다.
아내는 며칠 전 감동했던 제주 유명 식당의 밀면 보다 맛있다고 추임새를 넣어 주었다.
저녁엔 다시 육수를 내어 북엇국을 끓였다. 냉장고 속의 두부와 콩나물을 넣고 달걀도 풀었다.
그리고 깍두기와 마른 새우를 넣어 볶음밥도 만들었다.
'길티 프레져(GUILTY PLEASURE)'라고 하던가?
다이어트를 걱정하면서도 밤늦게 치맥을 할 때처럼 켕기지만 충분히 즐거울 때와 같은 느낌.
애초에 며칠에 한 번씩은 숙소에서 빈둥거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일은 무조건 쉬자 해놓곤 뒷날 아침
커튼을 걷을 때 쏟아져들어오는 햇빛을 보자마자 '길티 프레져'를 느끼며 마음을 바꾼 것이 여러 번이었다.
비 덕분에 비로소 하루를 온전히 방 안에서만 쉴 수 있게 되었다. 달콤한 하루였다.
노는 일도 쉬어가며 놀아야 한다. 여행도 쉬어 가며 해야 한다.
백무산 시인이 말했다.
"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
무엇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안다
무엇이 되지 않을 수 있는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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