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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제주살이 14 - 대정 삼의사비(三義士碑)

by 장돌뱅이. 2021. 10. 17.


추사 유배지 근처 대정읍 인성리에 「제주대정삼의사비」가 서있다. 
1901년 '이재수의 난'(일명 신축교란)을 주도하다가 처형된 세 장두(이재수, 오대현, 강우백)를 기리는 비석이다.
비가 세워진 내력이 뒷면에 음각되어 있다.  아내와 나는 비문을 소리내어 꼼꼼히 읽어 보았다.
천주교인이어서인지 첫문장이 서늘하게 그리고 부끄럽게 다가왔다.



"여기 세우는 이 비는 무릇 종교가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 주는
교훈적 표석이 될 것이다.
1899년 제주에 포교를 시작한 천주교는 당시 국제적 세력이 우세했던 프랑스 신부들에
의해 이루어지면서 그 때까지 민간신앙에 의지해 살아왔던 도민의 정서를 무시한 데다 봉세관과 심지어 무뢰배들까지
합세하여 그 폐단이 심하였다. 신당의 신목을 베어내고 제사를 금했으며 심지어 사형(私刑)을 멋대로 하여 성소 경내에서
사람이 죽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이에 대정 고을을 중심으로 일어난 도민 세력인 상무회(象武會)는 이 같은 상황을
진정하기 위하여 城內로 가던 중 지금의 한림읍인 명월진에서 주장인 오대현(吳大鉉)이 천주교 측에 체포됨으로써
그 뜻마저 좌절되고 만다. 이에 분기한 이재수(李在秀), 강우백(姜遇伯) 등은 2진으로 나누어 섬을 돌며 민병을
규합하고 교도들을 붙잡으니 민란으로 치닫게 된 경위가 이러했다. 규합한 민병 수천명이 제주시 외곽 황사평(黃蛇坪)에
집결하여 수차례 접전 끝에 제주성을 함락하니 1901년 5월 28일의 일이었다. 이미 입은 피해와 억울함으로 분노한
민병들은 관덕정 마당에서 천주교도 수백 명을 살상하니 무리한 포교가 빚은 큰 비극이었다. 천주교 측의 제보로
프랑스의 함대가 출동하였으며 조선 조정에서도 찰리어사(察理御使) 황기연(黃耆淵)이 이끄는 군대가 진입해
와 난은 진압되고 세 장두는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재판 과정을 거친 후에 처형되었다. 장두들은 끝까지 의연하여
제주 남아의 기개를 보였으며 그들의 시신은 서울 청파동 만리재에 묻었다고 전해 오나 거두지 못하였다.
대정은 본시 의기남아의 고장으로 조선 후기 이곳은 민중봉기의 진원지가 되어왔는데 1801년 황사영의
백서 사건으로 그의 아내 정난주가 유배되어 온 후 딱 100년 만에 일어난 이재 수난은 후세에 암시하는 바가
자못 크다.
1961년 신축(辛丑)에 향민들이 정성을 모아 「濟州大靜郡三義士碑」를 대정고을 홍살문
거리에 세웠던 것이 도로확장 등 사정으로 옮겨다니며 마모되고 초라하여 이제 여기 대정고을 청년들이
새 단장으로 비를 세워 후세에 기리고자 한다."

1997년 이 비를 세울 때 주민과 천주교 사이에 비문의 내용을 두고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천주교 측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비문의 첫 문장과 뒷부분의 문장 때문이었다.

1. 여기 세우는 이 비는 무릇 종교가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 주는 교훈적 표석이 될 것이다.

2. 1801년 황사영의 백서 사건으로 그의 아내 정난주가 유배되어 온 후 딱 100년 만에 일어난
     이재수난은 후세에 암시하는 바가 자못 크다. 


첫대목은 사건의 설명에 앞선 개념 규정이, 둘째 대목은 정난주의 이야기는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팽팽하던 대립은 결국 천주교 측의 양보로 비문의 수정없이 원안 그대로 세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한말 고종은 병인양요에 대한 보상으로 프랑스 신부들에게 "여아대(如我待 : 나를 대하듯 하라.)"라는 증표를 주었다. 
다른 지역보다 늦은 1899년에 처음으로 제주도에 전래된 천주교는 채 2년이 지나지 않아 영세자 242명, 예비신자 700명에
이를 정도로 교세가 확장되었다. 이는 '여아대'의 힘을 가진 천주교 신부와 성당의 치외법권에 기대어 특권과 이권을
얻으려는 지방 지배세력들과 무뢰배들까지 대거 입교한 결과였다.
이들은 천주교를 등에 업고 많은 악행을 저질러 제주 민중과 빈번한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외국 선교사들은 제주 민중의 토착 신앙과 정서를 철저히 무시하며 제주도를 '거칠고 미개하고 배타적이며
미신에만 열중하는 곳'으로 간주하였다. 이들은 신당을 파괴하여 공소의 재목으로 썼으며 수백 년 넘은 팽나무 신목을
베고 신당 터를 경작지로 바꾸어 버렸다.  여기에 천주교 봉세관의 과중한 세금 요구 등이 더해지자
1901년 이재수·오대현·강우백을 중심으로 대정 지역의 농민들이 천주교도 타도를 외치며 일어나 민란이 시작되었다.

옛 삼의사비(출처:제주환경일보)


"고종 계년(季年) 프랑스인이 우리나라에서 선교할 제, 제주의 무뢰배들이 교당에 투입하여 세력을
믿고 위세를 떨쳤으며 탐학을 마음대로 하고 민재(民材)를 탈취하고 부녀를 겁간하여 경내가 경난
하게 되어 관부에서 금지하여도 막을 수 없었다. (· · ·)  아아! 설교(說敎)는 각국의 공법(公法)이나
내 민중은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저들은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을 모아 민재를
탈취하고 부녀를 겁간하고 고병(庫兵)을 마음대로 끌어내어 사람 죽이기를 성(城)과 같이 하였다.
그 난적을 사람마다 죽임은 아예 물을 것도 없는 것이요, 적인(賊人)을 가르쳐 학살하게 하였으니
백성으로서 의기 있는 자 어찌 가만히 보고 모진 짓 하는 대로 맡겨둘 수 있겠는가?"
-옛 삼의사비 비문 중에서-


민란이 진압된 후 이재수 등 장두들은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되었고  프랑스는 제주도민에게 거액의 배상금을
요구하는 등의 정치·경제적인 보복을 단행하였다고 한다. 서세동점 시기에 종교는 제국주의 진출과 연관되어 있다.
'이재수의 난'은 천주교만이 아니라  제국주의라는 외세에 맞선 민중항쟁이기도 했다.

2003년 11월7일 천주교 제주교구와 제주도민을 대표한 '1901년 제주항쟁기념사업회'가 '화해와 기념을 위한
미래선언'을 채택했다. 두 단체는 "상호 존중의 기조 위에서 과거사의 진실을 명명백백히 밝힐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제주 공동체의 화합과 상생의 길로 나아가고자 노력"하기로 했다.

 

천주교 측은 "과거 교회가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동양 강점을 위한 치열한 각축의 시기에 선교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제주 민중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던 잘못을 사과" 했고, 기념사업회도 "봉건왕조의 압제와 외세의 침탈에
맞서 분연히 항쟁하는 과정에서 많은 천주교인과 무고한 인명 살상의 비극을 초래한 데 대하여 사과"했다.

다행스런 일이다. 참회와 용서는 종교 이전에 인간 사회가 발전하는 최소한도의 출발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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