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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제주살이 15 - 집밥(후반부)

by 장돌뱅이. 2021. 10. 19.

한 달 동안 제주살이를 마치고 돌아왔다.
공항의 문을 나서자 한파경보가 내린 서울의 냉랭한 공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감미로운 꿈에서 갑자기 깨어난 것처럼 뭔가 어색한 발걸음이 떼어졌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순간은 늘 그랬다. 마치 '지금 여기를 걷고 있을 때가 아닌데···' 하는 느낌으로. 
이번엔 한 달이라는 조금 더 긴 시간 때문인지 현실로 돌아온 첫 순간이 조금 더 낯설었다.

여행은 끝났지만 여행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맛있는 과자를 아껴가며 먹듯 아직 따끈한 여행의 기억을 길게 늘여가며 곱씹어 보아야겠다.
여행의 전반부가 끝날 무렵 집밥과 식당밥과 카페에 대해 대강의 정리를 한 적이 있다.
그 뒤로 이어진 같은 범주의 후반부도 정리해 본다. 

매일 저녁 다른 음식을 만들어보겠다는 애초의 계획은 거의 지켰다.
나머지 10%는 남은 음식을 다시 데워 먹어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경우였다. 
한 번쯤 비빔국수나 베트남 국수 분짜를 만들려고 했는데, 숙소의 주인이 여러 재료를 주셔서
그 음식을 만드느라 현지 마트에서 산 쌀국수는 개봉도 못하고 말았다. 

음식을 먹으면 그 재료는 똥이 되어 나가지만, 맛은 사라지지 않고 마음의 지층 맨 밑바닥에 숨어 있다가
불현듯 솟아오른다. 지나간 맛은 지나갔다고 해서 부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지나간 맛이 살아나서,
먹고 싶은 미래의 맛을 감질나게 하고, 지금 이 순간의 맛이 지나간 맛을 일깨워서, 나는 지나간 맛과
지금 이 순간의 맛과 다가오는 맛을 구분하지 못한다.  (···먹을 것이 없어도 맛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 김훈의 글 중에서 -
  

↑좋아하는 음식을 단 한 가지만 고르라면 나는 된장찌개이고 아내는 볶은 김장김치이다.
만드는 입장에선 조리법이 비교적 간단해서 좋다. 거기에 두부를 데치거나 부쳐내면 그럴듯해 보인다.
가끔은 돼지고기를 김치와 함께 볶기도 하는데 아내는 그냥 김치만 볶은 걸 더 좋아한다. 

↑콩나물은 볶아서도 먹고 무쳐서도 먹었다. 조리 방법만 다를 뿐 모양도 비슷하고 맛도 비슷하다.

↑어묵국. 무를 많이 넣고 멸치육수를 우려 만들었다. 

↑슴슴한 맛의 무 된장국. '슴슴하다'는 말, 쓰기는 했지만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국립국어원 사전에는 '심심하다'와 동의어로 나와있지만 결코 그건 아닌 것 같다.
아무튼 '심심하게'가 아닌 '슴슴하게' 만들었다. 

↑카레덮밥. 양파와 감자, 당근 그리고 고기 대신 햄을 넣어 만든 카레.
매번 어깨너머로만 보다가 이번에 아내에게 확실하게 배웠다.

↑숙소 주인이 깨끗하게 손질된 한치를 주셔서 덮밥으로 만들었다.
문득 한치와 오징어가 어떻게 다르지? 하는 생각이 들어 인터넷을 찾아보니 한치는 오징어에 비해 다리가 짧다고 한다.
'한치가 쌀밥이라면 오징어는 보리밥이고, 한치가 인절미라면 오징어는 개떡이다'라는 제주도 속담이 있다고 하지만
나로서는 맛과 식감의 차이를 구분할 수 없다. 아무튼 둘 다 맛있다.  
 

멸치야채육수

 

메밀가루반죽

 

↑비 오는 날엔 진한 멸치육수에 수제비. 이건 여행을 앞두고 아내와 합의한 메뉴였다.
그런데 3주 동안 내내 맑은 날씨가 계속되어 불만이(?) 많았다가 아침부터 비가 오는 날
드디어!라는 기분으로 즐거워졌다. 밀가루가 아닌 메밀가루로 반죽을 만들었다.
알맞은 점도의 반죽을 떼어 넣을 때 손끝의 부드러운 감촉이 유쾌했다.

↑깍두기마른새우볶음밥. '냉장고 파먹기(냉파)'라고 하던가.
집에 돌아갈 날이 가까워지면서 새로운 재료를 사는 대신에 있는 재료를 모아 새로운(?) 음식을 만들게 되었다. 

↑북엇국은 비 오는 날의 저녁 식단이었다. 수제비를 만들 때와 같은 멸치육수에 콩나물과 두부도 넣었다.
내가 만드는 북엇국의 롤모델은 서울시청 부근에 있는 식당 "무교동북어국"이다. 물론 아직 멀었다.

↑돼지고기김치찌개를 만들려고 했는데 국처럼 되었다.
신혼 초 돼지고기를 넣은 김치찌개를 만들어 달라고 하자 아내는 놀라워했다.
돼지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아내의 집에서는 멸치김치찌개(멸김)만을 먹어왔던 것이다.
끓여주긴 하면서도 탐탁지 않아했던 아내는 지금은 '돼김'을 좋아하게 되었다.
부부는 세월을 따라 서로 닮아간다.

↑이번 제주살이의 마지막 집밥. '마지막'이 주는 아쉬움이 매 숟가락마다 얹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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