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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제주살이 17 - 카페(후반부)

by 장돌뱅이. 2021. 10. 21.

비단 제주도만의 현상은 아니겠지만 제주도에는 카페가 참 많다.
아름다운 뷰와 시선을 끄는 기발한 장식과 분위기, 그리고 맛난 음료를 준비한 카페들이 가는 곳마다 널려있다.

2010년 불과 100여 개였던 제주도 내의 카페는 2017년 12월을 기준 약 1800개로 급증했으며 코로나로
해외여행이 막힌 최근에는 증가세가 전국 최고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카페 1개당 인구수가 360명 정도로 서울의 674명, 부산의 863에 비해 절반 정도이고 전국에서도 가장 적다.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지역 특수성으로 그 차이를 메꾸기는 역부족이지 않을까?
2019년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3년 내 폐업률도 62.8%로 전국 1위라고 한다. 
차별화된 공간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냉엄한 생존경쟁이 제주 카페 현장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가볍게 떠도는 여행자가 걱정할 주제는 아닐지 모르겠다. 다만 많은 카페의 주인들이 젊은 층으로 보여
결국 청년들의 일자리 문제도 카페 증가의 한 이유가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잠시 인터넷을 뒤져보았을 뿐이다.

어쨌든 다양한 위치와 분위기의 카페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제주 여행의 큰 재미였다.
바닷가나 귤밭, 오름의 전망을 커다란 통창에 담은 카페는 위치에 수긍이 갔지만 마을 한 복판에 있는
집이나 창고를  개조한 카페는 의외였다.
옛 공간의 외관을 바꾸지 않아 가까이 다가설 때까지  카페의 존재를 알아차리기 힘든 곳도 있었다.
   
우리는 되도록 올레길 같이 하루 일정을 끝내는 곳에서 가까운 카페를 찾았지만, 인터넷을 보면  처음부터
특정 카페를 유명 여행지처럼 방문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물론 그런 곳은 대개  북적이는 분위기로 조용히  멍때리기에는 적절치 않다는 흠이 있긴 했다.



1.뷰스트

 

 

 

↑이번 여행에 만난 카페 중 가장 시원스러운 뷰를 가진 곳이다. 올레10코스 사계항 근처 도로변에 있다.
창문에 거칠 것 없는 푸른 바다가 가득하다. 거기에 송악산과 형제섬, 그리고 뒤쪽 창으로는 산방산까지 볼 수 있다.
많은 방문객들로 다소 번잡한, 그래서 불가피한 좋은 자리 쟁탈전(?)만 빼곤 다(디저트와 음료) 좋았다.


2. EPL

 

 

↑EPL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혹시 "English Premier League?"
답은 "EAT PLAY LOVE"라 한다.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한 영화 제목 "EAT PRAY LOVE"를 모방한 느낌이다.
너무 큰 규모라 그런지 휑한 공간의 낭비가 많아 짜임새가 부족해 보였다. 
더불어 카페에서 느끼고자 하는 밀도 높은 사적 분위기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3. 트로피컬 하이드어웨이 카페

↑올레길10코스의 마지막은 산방산을 보며 걷기 위해 대정읍에서 시작해서 시계 반대방향으로 걸었다. 
그 마지막 지점에 있는, 호텔 트로피컬 하이드어웨에 속해 있는 카페다. 분위기는 호텔 커피숖 같았다.
'카페멍'을  하러 간 곳이 아니라 분위기는  크게 상관없었다.
더운 날씨에 송악산 둘레길을 걸은 터라 시원한 생맥주 한 잔이 급했기 때문이다. 

트로피컬 하이드어웨이는 이번 여행 시작을 하며 3일 정도 투숙할 뻔한 곳이었다.

원래 젠하이드어웨이를 예약하려고 홈페이지를 클릭했다가 실수로 같은 화면에 있는 트로피컬  하이드어웨이를 들어가게 되었다.
나중에 발견하고 부랴부랴 취소를 하고 젠하이드어웨이로 바꾸었다. 하지만 이래저래 하이드어웨이는 인연이 없었는지
추석 전
태풍 14호 찬투의 영향권에 들어 결국 젠하이드어웨이도 자동취소가 되고 말았다.  


4. 카페 와랑와랑

 

↑위미동백군락지 근처에 있는 아담한 카페다. '와랑와랑'은 '불기운이 세차게 피어나는 모양'을 뜻하는 '우럭우럭'의 제주도 말이다.
표준어보다 사투리가 더 실감나고 적절한 표현처럼 느껴지는 단어가 있는데 '와랑와랑'이 그렇다.
창밖으로 보이는 아담한 크기의 귤밭에 한낮이면 햇살이  '우럭우럭'하기 보단 '와랑와랑'했을 것 같다.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해야 할 것 같은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카페에는 고소한 고물이 묻은 찰떡구이도 있었다.


*'와랑와랑'이란 말

움직임도 아니고 음악도 아니고 어떤 절규도 아닌 말. (···) 할머니와 어머닌 이 말을 참 많이 사랑 하셨지. 이 말 안에는
모든 여인들의 손과 발이, 얼굴에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펄떡펄떡 끓는 한여름의 가마솥 열기 같은 강렬함이 솟아나는 거야.
뿐인 줄 아나. 한낮의 불볕 아래 조이삭처럼 고개 숙여 조를 베던 여인들과 그 가족들의 노동도 떠오르지.


(···) 4·3 초토화의 계절. 계곡으로 토벌대를 피해 도망치다 급기야 죽은 아기를 낳고는 핏물 흥건한 갈옷을 입은 채 도망쳐야 했다는 사연.
(···) 왜 떠오르나 몰라. 그해 눈 덮힌 벌판 위를 아기 업고 안고 필사적으로 이리저리 달리던 여인들의 젖은 등허리가.
내 가슴도 와랑와랑이야.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덜컥거리는 순간 숨이 멈춰버릴 것 같은 순간 무엇인가 결행을 위한 부추김, 그러한 동작의 이름 와랑와랑.
그 시절, 아니 구비구비 삶의 길 위에서 어느 한 순간, 와랑와랑 아니었던 이어디 있을까.

- 허영선, 『당신은 설워할 봄이라고 있었겠지만』 중에서 -

나 같은 '육지 것'들은 이해하기 힘든 제주 사람만의 감정이 들어있는 듯한 말, 와랑와랑.
처절함에 앞서 우선은 예쁘다. 

 
5. 카페 지니

 

 

↑공천포에 있는, 카페라기보다는 이름난 빵집 같았다.
원래 방문하려던 카페가 하필 휴무여서 돌아나오다 눈에 띄어 들어간 곳이었다. 메뉴를 정하는 중에
빵을 사러 온 손님들과 (인기 빵이)
다 떨어졌다고 미안해 하는 직원과의 대화가 자주 들렸다.
판매대 위에 남은 빵 중에서 한두 가지를 주문하였는데 아내는 담백한 맛이라고 했다. 

안내판에 쓰인 제빵사로서 이름난 호텔 등을 거친 주인장의 이력이 화려해 보였다.


6. 겹겹의 의도

 

↑겹겹의 의도?
직원은 책의 제목이기도 하고 겹겹이 쌓이는 듯한 빵의 조직을 의미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프랑스 화가이며 작가인 장자끄 쌍뻬가 쓴 수필집의 제목이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공간에서 다양한 삶의 모습을 포착해냈다고 책 소개에 나와 있었다.  
우리가 머무는 자리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대화를 나누었을까 생각해보니 책 한 권 이상으로 쓸만하겠다.
정유미와 한예리 등이 나왔던 영화 "더 테이블"도 카페의 한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사연을 담고 있지 않았던가.
우리가 앉았던 자리, 우리가 여행한 제주, 우리가 사는 세상· · ·  누군가 우리와 같이 똑같이 어느 곳에서든지
꿈을 꾸고 사랑을 하고
걱정과 슬픔을 나누면서 생의 소중한 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런 '멍'을 때리다 보니 카페의 시간과 자리가 주는 의미가  만만찮아지기도 했다.

향긋한 냄새가 나는 빵 몇 개를 봉투에 담아 돌아왔다. 


7. 율커피

 

숙소 주인장과 함께

 

↑우리가 묵었던 숙소의 1층에 있어 귤밭을 가꾸는 숙소 주인과 자연스레 이곳에서 만나 몇 번 커피를 마셨다.
아내와 둘이서도 가고 손님과 함께 방문하기도 했다. 건물 자체는 길에 접해 있지만 카페 문이 있는 뒤쪽으로
돌아가면 귤밭과 접해 있어 한가로운 분위기를 낸다. 오후 5시에 문을 닫지 않았다면 더 자주 갔을 것이다.

조용한 성품의 카페 주인은 길냥이 두 마리를 보살핀다. 
일정 시간이면 어슬렁어슬렁 나타나 익숙한 듯 자리를 잡는 녀석들에게 정성스레 먹을 것을 내주었다.
몇 가지의 먹이를 사두었다가 섞어서 주는 것 같았다. 고양이도 카페 주인을 닮아가는지 조용히 와서 울음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음식을 먹고는 제 갈 길을 갔다. 따뜻한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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