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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제주살이 20 - 마라도

by 장돌뱅이. 2021. 11. 5.


모슬포 운진항에서 국토의 최남단 마라도를 다녀오는데 3시간쯤 걸린다.

배로 왕복하는데 1시간, 마라도에 머무는 시간 2시간을 합쳐서 그렇다.  

 

 


마라도에 도착하면 걷는 일 이외에 할 일이 많지 않다. 우리는 반시계 방향으로 섬의 둘레길을 따라 걸었다. 
어디서, 어느 방향을 바라보거나 바다가 보이고 수평선이 보였다. 허허벌판이 아닌 허허바다.
무한대의 텅 빈 바다가 가슴을 가득 채울 듯 밀려들었다.
"광활한 지평선을 마음껏 즐기는 사람만이 세상에 행복한 사람"이라고 힌두교의 신이 말했다.
그 말 속 지평선을 수평선으로 바꾸어도 마찬가지 아닐까?

 


북위 37도 07분, 동경 126도 16분. 대한민국 최남단의 좌표에 비가 서 있다.
주위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서로 품앗이로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면서.
우리에게도 옆에 있던 사람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친절을 베풀었다.

매번 아내만 모델로 세우고 사진을 찍다가 덕분에 함께 찍은 사진을 얻게 되었다. 

'대한민국 최남단' 기념비

국토 최남단에서 바라보는 남쪽 바다는 끝이라는 단절감 대신에 어딘가를 향한 출발점처럼
거칠 것 없이 환하게 열려 있었다. 


마라도에는 기원정사와 교회, 그리고 천주교 성당 등의 종교 건물이 있다. 그중에 성당에 들렸다.
아내와 내가 천주교 신자라서가 아니라 경당이 마라도 둘레길에 가장 가깝게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성당으로 축성을 받았으나 사제가 상주할 수 없는 사정이라 정확히는 경당이 맞다고 한다.
문이 닫혀 있어 내부는 보지 못하고 외부만 둘러보았다. 십자가만 아니라면 종교 건물이 아니라 귀여운 카페 같았다.
전복껍데기를 형상화했다고 하던가?

 


마라도에선 '수평선도 잔디밭 높이 만하다'.(이생진)
야트막한(?) 마라도의 바다는 위압적이지 않고 곰살맞아 보였다. 친근감 있게 다가왔다.
단순한 한 획의 수평선이 있을 뿐이지만 바라보며 걷는 것만으로 즐거웠다.

 

 


돌담으로 둘러싸인 두 기의 무덤을 보았다. 
세월에 낮아진 것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 봉분도 바다처럼 '잔디밭 높이 만했다'.
묏등엔 노란 풀꽃들을 키우고 있었다. 
제주도에서는 무덤을 '산'이라고 부르며 무덤 돌담을 '산담 또는 산갓'이라 부른다고 한다.

제주도 사람들에게 돌담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시도 눈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상징이다.
그들은 '돌에서 왔다가 돌로 돌아가는 사람들'이다. 돌 구들 위에서 태어나고 죽어서는 산담에
둘러싸인 작지왓(자갈밭)의 묘 속에 묻힌다. 살림집 벽체가 돌이며, 울타리와 올레, 수시로 밟고
다니는 잇돌(디딤돌)이 모두 돌이다. 산길은 물론 밭길, 심지어 어장길도 모두 돌밭이다. (···)
그 돌담의 미학을 제대로 읽어낸다면 제주도의 아름다움을 절반은 이해한 것으로 간주해도 좋지 않을까.

-주강현, 『제주기행』 중에서-  

 


제주도에선 신(神)들도 돌담 안에 산다.
마라도 선착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비바리당, 할망당, 처녀당이라고도 부르는마라도의 본향당(本鄕堂)이 있다. 
바다와 접한 언덕에 동그랗게 돌을 쌓아 마라도의 안녕과 순조로운 뱃길을 지켜주는 본향신을 모시는 것이다.
본향은 마을의 수호신을 말한다. 제주도 어느 마을에도 있다고 한다.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옛날 모슬포 해녀들이 마라도에 물질을 하러 왔는데 날씨가 궂어 작업을 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우두머리해녀(상군해녀)가
꿈을 꾸었는데 마라도를 떠날 때 아기업개(아기를 돌보는 처녀)를 두고 가야 무사히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린 아기업개는 언덕에 올라 떠나는  배를 향해 발버둥쳤지만 결국 홀로 남아 굶어 죽었다. 해가 바뀌어 다시
마라도에 온 해녀들은 아기업개의 넋을 위로하고자  처녀당을 짓고 제를 지냈다고 한다.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삶을 살아내야 했던 제주 여성의 고단함과 꿋꿋함을 담은 전설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아기업개당


마라도는 제주 본섬의 해안과 같은 드라마틱한 절경을 보여주진 않았지만 국토의 최남단이라는 상징과 함께
어디서나 푸른 초원이나 흰 억새, 혹은 검은 돌을 넘어 시원스러운 망망대해를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굴곡진 경사 없이 완만한 둘레길도 걷기에 더없이 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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