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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기러기

by 장돌뱅이. 2021. 12. 8.


저녁나절 한강을 산책하다 허공을 나는 한 무리의 기러기를 보았다.
기러기 떼는 동쪽 한강 상류 쪽에서 날아와 서남쪽 빌딩 너머의 하늘로 사라졌다.
서울 인근에도 기러기가 살고 있는지 아니면 남쪽으로 가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서울이 고향인 내게 기러기는 어릴 적부터 생활 속에 자연스레 스민 정서라기보다는 책이나 TV를 통해 배운 지식이다
아래 글에는 기러기가 날면서 내는 울음소리가 아래 글처럼 '쇄쇗 쇄쇗'이라고 나오지만
다른 책에는 '과아한 과아한'이나 '큐위이 큐위이' 라고도 나온다.
어느 것이 진짜 소리에 가까운지 나는 들어본 적이 없으므로 판단할 수 없다.
그래도 기러기가 날아가는 가을밤에 대한 묘사를 읽으면 왠지 마음이 따뜻해진다.


모닥불은 계속 지펴지는 데다 달빛은 또 그렇게 고와 동네는 밤새껏 매양 황혼녘이었고, 뒷산 솔수펑이 속에서는
어른들 코골음 같은 부엉이 울음이 마루 밑에서 강아지 꿈꾸는 소리처럼 정겹게 들려오고 있었다. 쇄쇗 쇄쇗······
머리 위에서는 이따금 기러기 지나가는 소리가 유독 컸으며, 낄륵 - 하는 기러기 울음소리가 들리 즈음이면 마당
가장자리에는 가지런한 기러기떼 그림자가 달빛을 한 움큼씩 훔치며 달아나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별 하나 주워볼
수 없고 구름 한 조각 묻어 있지 않았으며, 오직 우리 어머니 마음 같은 달덩이만이 가득해 있음을 나는 보았다.
달빛에 밀려 건듯건듯 볼따귀를 스치며 내리는 무서리 서슬에 옷깃을 여며가며, 개울 건너 과수원 울타리 안에서
남은 능금과 탱자 냄새가 맴돌아, 천지에 생긴 것이란 온통 영글고 농익어가는 듯 촘촘히 깊어가던 밤을 지켜본 것이다.


- 이문구의 소설, 「공산토월」 중에서 -

 
기러기는 전 세계에 14종이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쇠기러기, 큰기러기, 개리 등 7종이 찾아와
대략 10월 중순부터 2월까지 머문다고 한다. 

기러기는 전통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친근한 새다. 인륜지대사인 혼례에도 등장한다. 
전안례(奠雁禮)라고 하여 신랑이 기러기 모형을 가지고 신부집으로 가서 상 위에 놓고  절을 하는 것이다.
기러기는 한 번 맺어진 상대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헤어지지 않고 다른 새를 만나지 않는 정절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안행(雁行, 안항)은 기러기 행렬이라는 뜻으로, 남의 형제를 높여 부를 때 사용한다.
요즈음엔 잘 사용하지 않지만 "안항이 모두 몇 분입니까?" 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또 'ㅅ'자 대형으로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모습을 본떠서 사람들은 안행진(雁行陣)이라는 진법을 창안하기도 했다.


기러기는 내가 좋아하는 동요 「가을밤」(박태준 작곡/ 이태선 작사)에도 나온다.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초가집 뒷산 길 어두워질 때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가을밤 고요한 밤 잠 안 오는 밤
기러기 울음소리 높고 낮을 때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1920년에 이 노래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의 원래 제목은 「기러기」였다.
작사가는 윤복진으로 지금의 「가을밤」과는 가사가 다르다.

울 밑에 귀뚜라미 우는 달밤에
길을 잃은 기러기 날아갑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넓은 하늘로
엄마 엄마 찾으며 흘러갑니다.

오동잎이 우수수 지는 달밤에
아들 찾는 기러기 울며 갑니다.
엄마엄마 울고 간 잠든 하늘로
기럭기럭 부르며 울고 갑니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며 가사를 음미하면 기러기 같았던 민족의 고통과 설움이 더 절절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윤복진이 해방 후 월북하여 이 노래는 우리 사회에서 금기가 되었다.
이후 이태선이 새로 가사를 붙여 「가을밤」이 되었다.
70년 대에 기수 이연실은 개사를 하여 「찔레꽃」이라는 노래로 부르기도 했다.


윤석중이 쓴 동시 「기러기」도 있다.
미국의 작곡가 포스터의 곡에 붙여 우리에겐 동요로 많이 알려져 있다.

달 밝은 가을밤에 기러기들이
찬서리 맞으면서 어디로들 가나요
고단한 날개 쉬어 가라고
갈대들이 손을 저어 기러기를 부르네

산 넘고 물을 건너 머나먼 길을
훨훨 날아 우리 땅을 다시 찾아왔어요
기러기들이 살러 가는 곳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너는 알고 있겠지


겨울이 깊어간다. 스산한 기운에 옷은 점점 두툼해지고 목은 움츠려 든다.
손으로 감싸쥔 따뜻한 커피잔처럼 가까운 사람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더 건네며 지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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