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를 하고 무엇을 할까 아내와 의논을 했다.
아내는 "외국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보는 게 어떨까?" 하고 권했다.
직장 생활의 대부분을 해외영업으로 보냈고 외국에서 10년 가까이 살기까지 했으니 그들을 위한 뭔가를 해야하지 않겠느냐고 평소에도 이야기해 온 터였다.
나는 그 말에 동의를 하고 "한국어 교원 양성과정"이란 단기 교육 과정에 등록을 했다.
그러나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 위해 120시간의 짧은 기간 수업을 받으면서 내가 느낀 것은 60년 넘게 사용해온 우리말이 너무, 매우, 정말, 진짜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예를 들면 "맛있다"는 '마딛따'나 '마싣따'로 읽어도 되지만 "맛없다"는 '마덥따'만 된다던가, 주격조사라고 하면 그냥 막연히 '은/는/이/가'로 생각했는데 '이/가'만 주격조사이고 '은/는'은 보조사이고 쓰임새도 다르다던가, '너마저···'와 '너까지···' 그리고 '너조차···'의 의미와 용도가 다르다던가 등등.
내가 한국인이어서 무심히 사용하던 말들이 그런 복잡한 어법을 갖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리고 그걸 나처럼 모국어여서 직관으로 알 수 없는 외국인들에게 어떻게 논리적으로 가르쳐야 하나 막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게다가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는 나 역시 직관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위 사진 속 책도 사실 이름부터 잘못되었다.
『외국어로서의 한국어교육학 개론』할 때 "로서의"는 일본말 "としての"를 직역한 것으로 우리말에는 없는 어법이다. "의"를 빼고 "로서"만 써야 한다.
이 말이 어색하다면 아예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교육학 개론』"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처럼 일본 책을 번역하는 지식인들의 영향이 시나브로 우리말에 스며든 예는 많다.
- 전통문화와의 만남 → 전통문화와
- 아름다움에의 약속입니다 → 아름다움을 약속합니다
- 앞으로의 귀추가 어떠하든 간에 → 앞으로
- 글에서의 감동이란 → 글에서, 글의, 글에서 얻는
- 소설가로서의 권위 → 소설가로서, 소설가의
-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이루기 위해 → 억압에서
- 행복에로의 인도 → 행복으로 (인도함) (안내함), 행복의 (길잡이)
(*이상 이오덕 선생님의 『우리 글 바로 쓰기』 참고)
나는 수료에 이은 한국어 교원 자격 3급이나 2급 도전을 포기하고 말았다.
학창 시절부터 공부에는 젬병인 나의 머리로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래도 한국어를 가르치고 싶은 의욕은 버리지 못해 한 커뮤니티에 가입하여 미얀마 이주 노동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며칠 전 강변을 달릴 때 갑자기 많은 눈이 쏟아졌다.
눈은 바람을 타고 삽시간에 눈앞이 자욱해질 정도로 밀려왔다.
나는 괜히 아이들처럼 신이 나서 걷는 대신 김민기의 옛 노래 "천리길"을 흥얼거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득 '천리길이 맞나? 아니면 천릿길인가?'가 궁금해져 왔다.
혼자만의 생각으론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달리기를 멈추고 휴대폰으로 검색을 해 보아야 했다.
답은 '천리길'도 아니고 '천릿길'도 아닌 '천 리 길'이었다.
'천'은 관형사, '리'는 불완전 명사, '길'은 명사라는 것이다.
"제길 우리말인데 너무 어려워."
혼자 투덜거리며 다시 달리기를 계속했다.
집에 와서 사이시옷에 대해 좀 더 알아봤다.
슬슬 머리가 아파왔지만 뜬금없는 오기 같은 것도 생겼다.
한글 맞춤법의 사이시옷 규정(30항)에는 사이시옷을 쓰는 세 가지 경우가 나와 있었다.
첫째, 순우리말로 된 합성어로 앞말이 모음으로 끝난 경우,
1) 뒷말의 첫소리가 된소리로 나는 것 : 날갯짓(날개찟/날갣찟), 귓밥(귀빱/귇빱), 나룻배(나루빼/나룯빼), 나뭇가지(나무까지/나묻까지), 냇가(내까/낻까) 등
2) 뒷말의 첫소리 'ㄴ','ㅁ' 앞에서 'ㄴ' 소리가 덧나는 것 : 멧나물(멘나물), 아랫니(아랜니), 텃마당(턴마당) 등
3) 뒷말의 첫소리 모음 앞에서 'ㄴㄴ' 소리가 덧나는 것 : 도리깻열(도리깬녈), 뒷윷(뒨늋), 두렛일(두렌닐) 등
둘째, 우리말과 한자어로 된 합성어로서 앞말이 모음으로 끝난 경우
1) 뒷말의 첫소리가 된소리로 나는 것 : 등굣길(등교낄/등굗낄), 귓병(귀뼝/귇뼝), 뱃병(배뼝/밷뼝), 사잣밥(사자빱/사잗빱) 등
2) 뒷말의 첫소리 'ㄴ, ㅁ' 앞에서 'ㄴ' 소리가 덧나는 것 : 곗날(겐날/계날), 제삿날(제산날), 훗날(훈날) 등
3) 뒷말의 첫소리 모음 앞에서 'ㄴㄴ' 소리가 덧나는 것 : 가욋일(가왼닐/가웬닐), 예삿일(예산닐) 등
셋째, 두 음절로 된 다음 한자어 : 곳간(庫間), 셋방(貰房), 숫자(數字), 찻간(車間), 툇간(退間), 횟수(回數)에만 사이시옷을 쓴다.
규칙을 외우기도 힘들지만 외운다고 해도 실제 쓰는 데는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예를 들어 해님(햇님X), 순댓국(순대국X), 만둣국(만두국X), 새뱃돈(새배돈X), 머리말(머릿말X), 인사말(인삿말X), 나무꾼(나뭇군X), 개수(갯수X)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셋방과 전셋집은 맞는데 전셋방(X)은 틀리고, 찻간은 맞는데 기찻간(X)은 틀린다고 하면 머리에 쥐가 나기 시작한다( X표는 틀린 표기다).
마시는 차(茶)는 한자이므로 또 다른 한자어 잔(盞)과 만나면 '차잔'으로 써야 할 것 같은데 '찻잔'이 맞는 표기라고 한다. '차'를 우리말로 보기 때문이란다.
나로서는 필요할 때마다 일일이 사전을 찾아보는 게 최선일 것 같았다.
학창 시절 민중서관 영어 사전으로 영어 단어 찾아보듯.
혹시 사이시옷을 일제히 없애는 건 우리말의 특징을 없애는 걸까?
무엇이건 제대로 안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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