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연말 한 대통령 후보자가 "자유의 본질은 일정 수준의 교육과 기본적인 경제 역량이 있어야지 알 수 있는 것이라며", "극빈한 생활을 하고 배운 것이 없는 사람은 자유가 뭔지 모를 뿐 아니가 자유가 왜 개인에게 필요한지에 대한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상식과는 다른 말이다. 지난 어느 역사를 돌이켜보아도 가진 게 없거나 배운 게 적다고 해서 자유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일수록 자유의 가치를 더 절절히 체득하고 있었다.
간단히 말하면 인류의 역사는 소수의 지배 권력으로부터 다수의 시민이 정치·경제·사회적 자유를 확대해온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도 지배 권력이 스스로 시혜를 베푼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처절한 항거와 투쟁을 통해서 쟁취해왔다.
우리의 근현대사를 돌아보더라도 그 사실은 명확해진다. 나라를 망치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트린 사람들은 '배우고 힘 있는 자들'이었고, 그를 바로잡기 위해 막강한 적의 화력에 맨손으로 맞선 사람들은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백성들이었다.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로 일어섰다가 관군과 일본군의 총에 스러진 동학농민전쟁의 농민들이 그랬고, 대한제국 시기에 기울어 가는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일어선 의병들이 그랬다. 1909년 호남 의병 초토화 작전(일제가 말하는 소위 "남한 대토벌 작전")이 전개된 두 달 동안에만 살해당한 의병의 숫자만 무려 18,000명에 달했던 것이다.
1919년 삼일운동 역시 민족대표 33인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이들은 군중들의 소요를 염려하여 탑골공원에서 선언문만 낭독하고 제 발로 자수하였다. ) 전국에 걸친 농민과 노동자들이 이끌어간 운동이었다. 일본 측 발표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집회 횟수 1,542회, 참가인원 202만 3천여 명, 사망자수 7,509명, 부상자 수 1만 5,961명이었다.
이승만의 독재를 타도한 4.19 혁명이나 박정희 군부독재를 이어받으려는 신군부에 맞섰던 5·18 광주 민주화운동, 6월항쟁 그리고 5년 전 겨울을 달구었던 촛불집회까지 흔들림 없이 민주주의와 자유를 지켜낸 사람들 역시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시민들이었다.
그들은 지식도 이론도 없고 운동과 조직 논리도 없었을지 모르지만 살아오면서 저절로 체득한 상식과 가치를 바탕으로 역사의 고비마다 온몸을 투신해 온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선택이 아니라 유일한 당위이고 책임이었을 것이다.
가자, 조국의 아들들이여 영광의 날은 왔나니 압제가 앞에 있지만 피의 깃발이 올려졌나니 피의 깃발은 올려졌나니 들판을 함께 가자 야만적인 적군을 무찌르자 적은 다가오고 있다 우리 아들, 우리 조국의 목을 치기 위해 (중략)
조국의 신성한 수호신이 우리 복수심에 불타는 군대를 보살피고 지켜줄지니 자유, 사랑하는 자유의 신이여 적과 싸우자 적과 싸우자 우리 깃발 아래서, 승리의 노래가 힘차게 울려 퍼질지니 쓰러져가는 적들도 그대의 승리와 영광을 보리라! 우리 군대와 시민의 승리를! (중략)
시민이여! 무기를 들어라 무장하라 전사들이여 전진하라! 전진하라! 적의 더러운 피가 우리 들판을 적시도록!
- 프랑스 국가(國歌), 「라 마르세예즈」부분 -
「라 마르세예즈」는 프랑스혁명 때 사람들이 불러 현재 프랑스의 국가가 되었다. 「라 마르세예즈」는 길다. 무려 7절까지 있고 후렴도 붙는다. 그래서인지 공식 행사에서는 1절과 6절만 부른다고 한다. 여타 나라의 국가완 달리 '살벌한' 가사를 통해 그 당시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사람들의 분노와 열정의 크기를, 혁명의 상징이 된 자유·평등·박애의 의미를, 그리고 그것을 가감없이 기억하고자 하는 프랑스인들의 마음을 짐작해본다.
좋든 싫든 우리는 정치 속에서 산다. 스스로 정치적이 아니라고 해도 이미 존재하는 정치의 그물을 벗어나 헤엄칠 수 없다. "올바른 정치적 입장은 올바른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다"는 말에 나는 동의한다.
5년 전 촛불에 놀라 꼬리를 감추었던 세력들이 일말의 반성도 없이 그 의미를 폄훼하며 이전의 시간으로 회귀하려고 적반하장의 준동을 하고 있다.『중용』은 "행동할 때 말을 돌아보고 말을 할 때 행동을 돌아보라"고 했다. 하물며 행동 이전에 스스로 역사에 대한 무지를 자랑처럼 '대언장어(大言壯語)'하는 후보와 세력를 보며 아직 내릴 수 없는 촛불의 기억을 되짚어 보게 된다. 내게 이번 선거는 여전히 그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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